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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08063099
· 쪽수 : 142쪽
책 소개
목차
□ 한승헌(韓勝憲) 론/최일남 7
1 어느 겨울날의 회상 15
2 또 한 해를 보내며 21
3 연하장 이야기 30
4 여성과 이혼 39
5 연극을 사랑합시다 49
6 4월은 다시 오건만 58
7 모두가 불쌍하다 65
8 이 어머니를 보라 73
9 노출의 사회학 80
10 친일과 항일 87
11 서남동 목사님을 생각하며 96
12 이 시대의 헛소리 105
13 법조인의 자화상 113
14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21
연보 129
저자소개
책속에서
보통의 바보들은 그 바보스러움으로 인한 피해가 자기 일신에 되미치는 것임에 반하여, 세도가나 지식인들의 우매함은 사회와 역사에 큰 피해를 준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의 횡포가 그러하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학기(學妓)들의 놀음이 그러하다. 한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할 지식인들이 자기 사명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기껏 현학(衒學)의 늪에서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이나 하는 꼴은 고급 바보의 대표적 모습일 것이다.
―〈바보예찬〉
이 인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특히 한승헌의 수필이나 에세이는 상식의 허구나 배운 자의 위선을 예리하게 헤쳐 보이되 그걸 패러디로 요리하는 묘미를 지닌다. 때문에 신변에 얽힌 이야기보다는 사회과학도답게 시사성 있는 소재를 곧잘 택한다. 인권이라든가 잘못된 권력의 횡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속 시원하게 비판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그가 체질적으로 가다듬은 서정이 깃들여 있어 내용이 건조하거나 삭막하지 않고 감칠맛을 더한다.
이런 내력은 변호사 한승헌과 문학인 한승헌이 깊이 ‘내통’하고 있다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다행스런 화합에서 찾을 수 있다. 법이 궁극적으로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고 문학이 사람의 참된 모습을 묘사하고 탐색하는 데에 뜻을 두고 있다면, 둘 다 지향하는 바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서로 수단과 기능이 다를 뿐, 드디어 도달하고자 하는 진실된 생(生)의 지평이라든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세우고 모색하는 의지는 비슷한 것이다. 이 점에서 한승헌은 자기 안에서 두 가지의 전문가적 직능을 잘 조화시키고 있는 셈이며, 그것은 그의 색다른 장점이다. 딱딱한 법의 정신과 유연한 문학의 심성을 스스로의 몸 안에서 녹여, 큰 테두리 속에서 인간을 파악하고 관조하는 체험을 통해 이 세상을 바라본다. 따라서 사고의 증폭이 획일적일 수가 없다.
물론 한승헌이 말하고 쓰는 변론이 한결같이 문학적인 표현으로 시종한다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언젠가 법정 방청석에 앉아 들은 한승헌의 변론은 당연히 법리론에 치중한 것이었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는 거기에도 시인의 체취와 수필가의 호흡이 있었다. 아전인수인지는 모르나, 같은 표현일망정 지적 분위기가 밴 언어 선택에서 그걸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한승헌은 유난히 ‘필화사건’ 변호를 많이 맡았다. 그 중에서도 남정현의 ‘분지’사건을 담당한 건 대표적인 예가 될 터이다. 훗날 그는 이 사건에 대한 경위와 심정을 길게 쓴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분지’사건은 이 민족을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던 한 작가를 좌절시켰다. 그리고 다른 많은 작가들에게도 사법의 이름으로 겁을 주어 문학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런 좌절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문학다운 문학을 지켜나가는 일이야말로 한 작가의 수난을 되새겨보는 우리들의 염원이며 책무일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상황의 타개 없이는 문학예술의 자유가 되살아나기는 어렵다…… ‘있는 상황’을 ‘있어야 할 상황’으로 변화시키는 우리들 자신의 노력이 없이는 문학예술의 자유도 다른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실체 없는 겉치레에 머물고 말 것이다.
―〈남정현의 필화, 분지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