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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영미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25545738
· 쪽수 : 728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책을 꺼내 별생각 없이 훑어보았다. 표지는 낡고 부드러운 가죽이며 내지들도 아주 오래되어 보였다. 책은 거의 저절로 중간 페이지로 넘어갔다. 그리고 두 페이지 가득, 꼬리를 길게 말아 올리고 날개를 활짝 펼친 용이 그려져 있었다. 목판화였다.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낸 야수의 발톱에 작은 깃발이 걸려 있고 그곳에 고딕체로 딱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드라쿨리아(Drakulya).’
그 단어를 보고, 내가 아직 읽어보지 않은 브램 스토커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아주 어린 시절 동네 극장에서 신인 여배우의 목에 이빨을 들이대던 벨라 루고시(1931년 작 <드라큘라>의 주인공-옮긴이)도 떠오르기는 했다. 그런데 단어의 철자도 이상하고 책도 분명 아주 오래된 종류였다. 더군다나 학자 신분으로 유럽사에 푹 빠져 있던 때가 아니던가. 나는 책을 잠깐 훑어본 후, 전에 읽은 글을 떠올렸다. 드라쿨리아는 실제로 ‘용’ 또는 ‘악마’를 뜻하는 라틴어이며, 또한 왈라키아의 폭군이자 카르파티아 산맥의 영주 ‘말뚝왕’ 블라드 체페슈(Vlad ?epe?)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했다. 전쟁 포로는 물론 가신들까지 너무나 잔혹한 방법으로 고문한 자다.
“로시 교수는 저희에게 특별한 분입니다. 지도교수이시기도 하지만, 우리… 저에게 특별한 정보를 남기기도 하셨죠. 그리고 지금은 실종되셨습니다.”
투르굿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실종?”
“예.” 나는 머뭇머뭇 로시와의 관계, 논문 지도, 도서관 열람실에서 발견한 이상한 책 등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책에 대해 설명할 때 투르굿이 벌떡 일어나며 손뼉을 쳤으나, 그래도 말은 하지 않고 내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로시에게 책을 가져간 이야기, 로시 교수님이 자신의 책과 만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세 권의 책.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이제 세 권, 마법의 숫자다. 대체 그 책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아니 관계가 있기는 한 걸까? 이스탄불에서 로시가 행한 조사는 물론 ?투르굿은 그 이야기에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옛 지도들의 윤곽이 용의 이미지와 흡사하다는 그의 견해도 전했다.
마지막으로 로시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설명했다. 그날 저녁 연구실 창문을 넘어간 기이한 그림자, 그 이후 내가 반신반의 상태에서 그를 찾기 시작한 경위까지 모두.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한 시간쯤? 그때 그녀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손을 목으로 가져갔다.
“왜 그래요?” 내가 놀라서 물었다.
헬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상처요. 다 낫긴 했는데 이렇게 가끔 쑤셔요…. 내가 폴과 가까이 해도 괜찮은 거겠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디, 헬렌, 내가 좀 볼게요.”
헬렌은 아무 말 없이 스카프를 벗고 가로등 불빛을 향해 턱을 들었다. 단단해 보이는 목에 보라색 상처 두 개가 보였다. 다소 안심은 되었다. 다시 공격당한 흔적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상처에 입술을 갖다 댔다.
“오, 폴, 안돼요!” 그녀가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그녀는 방어하듯 손으로 상처를 덮고 잠시 후 다시 스카프를 맸다. 감염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전보다 더 조심해 그녀를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오래전에 했어야 했는데…. 이걸 목에 걸어요.” 미국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구입한 작은 십자가였다. 목에 걸자 목걸이는 스카프 아래로 조심스럽게 늘어졌다. 그녀가 십자가를 어루만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