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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프랑스소설
· ISBN : 9788932405049
· 쪽수 : 200쪽
책 소개
목차
아주 편안한 죽음
I
II
III
IV
V
VI
VII
VIII
해설 타인에 대한 애도를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
판본 소개
시몬 드 보부아르 연보
리뷰
책속에서
마구 만지고 마음대로 다루는 전문가들의 손길에 내맡겨진, 의지할 데라곤 하나 없는 가련한 몸뚱이. 거기에서 생명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관성적인 상태로만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 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 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라고 말했을 때, 그건 내가 했던 다른 수많은 말처럼 빈말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산송장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라고 동생에게 말했었다. 이날 밤 이전까지 내가 느꼈던 슬픔은 모두 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슬픔에 잠겨 있을 때조차도 정신을 차린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에 느낀 절망감만큼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울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사르트르에게 엄마의 입에 대해,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 입에서 내가 읽어 낸 그 모든 것에 대해 들려주었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탐욕, 비굴함에 가까운 고분고분함, 희망, 비참함, 죽음과 대면해서뿐만 아니라 살아오는 동안 내내 느껴 왔을, 하지만 털어놓지 못했던 고독함에 대해서. 사르트르에 따르면 내가 더 이상 입을 내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내 얼굴에 엄마의 입을 포개어 놓고 나도 모르게 그 입 모양을 따라 했던 모양이다. 내 입은 엄마라고 하는 사람 전부를, 엄마의 삶 전체를 구현하고 있었다. 엄마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랑콤, 우비강, 에르메스, 랑방 등 고급 상점이 즐비해 있는 그 동네를 지나는 길 구석구석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신호에 걸려 피에르 카르댕 상점 앞에 자주 멈춰 서게 되었다. 펠트 모자, 속옷, 스카프, 구두, 앵클부츠 등 그다지 우아해 보이지 않는 상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한 색깔을 한 폭신해 보이는 실내 가운이 가게 안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장밋빛 잠옷을 대신할 잠옷 한 벌을 엄마에게 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향수, 모피, 속옷, 보석. 죽음에게 내어 줄 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뿜어내는 호화로운 거만함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의 이면에 죽음이 숨겨져 있었다. 개인병원, 종합 병원, 그리고 닫힌 병실이 간직하고 있는 침울한 비밀 속에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