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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고려시대
· ISBN : 9788933707494
· 쪽수 : 472쪽
· 출판일 : 2018-09-20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머리글 고려사회의 기본 성격
1. 머리말
2. 음서제와 과거제의 실체와 운영
3. 귀족과 문벌의식
4. 맺는말
제1부 통합과 개혁과 전쟁
제1장 통일신라와 고려의 민족통합정책 비교
1. 머리말
2. 신라의 통합정책
3. 고려의 통합정책
4. 맺는말
제2장 광종의 개혁
1. 성장과 즉위
2. 개혁의 모색
3. 개혁의 추진
4. 개혁의 지지세력
5. 반발과 탄압
6. 개혁의 좌절과 계승
제3장 서희의 외교 전쟁
1. 머리말
2. 고려 초기 요와의 관계
3. 요의 고려 침입과 서희의 활약
4. 맺는말
제2부 과거와 음서와 학교
제1장 과거와 음서
1. 머리말
2. 과거
3. 음서
4. 맺는말
제2장 고려시대의 문지재추
1. 머리말
2. 과거·비과거 출신 관리와 관직
3. 문지재추의 존재와 역할
4. 문지재추와 권력 분점
5. 맺는말
제3장 고려시대의 사학과 그 입학생
1. 머리말
2. 사학의 입학생
3. 국자감 학식과 사학
4. 맺는말
제3부 고려 사람 이야기
제1장 현욱·심희·찬유와 여주 고달사
1. 머리말
2. 고달사의 창건과 현욱
3. 심희와 고달사·봉림사
4. 찬유와 고달사의 부흥
5. 맺는말
제2장 승려 충담과 고려 태조
1. 머리말
2. 충담의 출가·수계와 영신사
3. 충담의 유학·귀국과 봉림사
4. 충담과 태조와 흥법사
5. 맺는말
제3장 박유·왕자지·왕의
1. 머리말
2. 박유
3. 왕자지와 왕의
4. 맺는말
제4장 최충의 활약과 가문의 번성
1. 최충의 성장과 중앙 진출
2. 관리 생활
3. 학교의 설립
4. 가문의 번성
제5장 시인 이수 이야기
1. 머리말
2. 출세
3. 몰락
4. 맺는말
제6장 김취려의 관력과 활동
1. 머리말
2. 입사
3. 초기의 관직과 활동
4. 거란의 침공과 활약
5. 최우 정권과 김취려
6. 맺는말
제4부 기록과 장례 문화
제1장 『파한집』 저술의 역사적 배경
1. 『파한집』의 간행
2. 『파한집』과 『보한집』
3. 『파한집』 저술의 배경
4. 『파한집』 저술의 의의
제2장 족보 이전의 가계기록
1. 머리말
2. 고대사회의 조상 숭배와 가계 전승
3. 가계의 분화와 기록의 정리
4. 고려시대의 가계기록
5. 맺는말
제3장 고려시대 묘지명 문화의 전개와 그 자료적 특성
1. 머리말
2. 묘지명 문화의 등장
3. 묘지명 등장의 사회적·사상적 배경
4. 묘지명을 만든 사람들
5. 고려 묘지명의 자료적 특성
6. 맺는말
제4장 정후영 묘지명
1. 머리말
2. 판독
3. 해석
4. 맺는말
제5장 고려시대의 장례와 택일
1. 머리말
2. 역일의 구주 장례 기사
3. 실제 사례의 장례일
4. 화장·습골·이장 등의 날짜
5. 승려의 장례일
6. 역일과 새 장례 문화의 도입
7. 맺는말
<부록>
맺는 글 삶과 죽음의 고려사회사
찾아보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광종의 개혁은 일시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는 실패한 것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 성공한 것으로 평가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광종이 이룩해 놓았거나 이룩하고자 했던 많은 부분이 경종뿐 아니라 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개혁되었기 때문이다. 경종의 즉위와 함께 호족세력이 복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들은 예전과 같은 세력을 결코 가질 수 없었다. 오히려 광종이 수립한 새로운 관리 질서 체계는 경종 대에 더욱 발전하여 경종 원년에 제정된 전시과田柴科 토지 지급의 밑바탕이 되었다. 과거제도 고려시대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계속 시행되면서 전통사회에서 관리를 등용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운영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를 통한 유학자의 등장과 더불어 호족세력이 약화됨으로써 고려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유교적 귀족국가’의 수립을 제시한 최승로의 이상적인 정치사상도 훨씬 현실감 있는 정책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최승로는 상서문을 통해 끈질기게 광종을 비판하였지만, 가장 고려적이고 이상적인 귀족사회가 광종의 개혁을 통해 비로소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 ‘제1부 통합과 개혁과 전쟁’ 중에서
과거 출신 관리들은 과거시험에 관한 업무를 독점적으로 주관하면서, 그 시험관들과 급제자들은 부자관계와 같았다는 좌주·문생門生 관계를 맺어 일생 동안 그들의 권익을 서로 지켜 주고 키워 주었다. 같은 해의 급제자들끼리도 동년회同年會를 만들어 형제같이 지냈다고 한다. 과거 출신자들끼리만 맺어진 이와 같은 인적 네트워크는 때로는 사회적 물의를 빚을 정도로 관직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급제자들에게는 화려한 시가행진과 성대한 축하연을 열어 주고, 세 아들을 급제시킨 어머니에게는 종신토록 해마다 국가에서 녹祿을 주는 제도를 만드는 등 사회적으로 급제자와 그 가문의 영예를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음서 출신 관리들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만한 조직 같은 것도 없었고, 그들만의 독점적 권한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관리가 된 후에는 음서 출신자가 과거급제자에 비해 결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음서 출신자의 약 40%가 다시 과거에 합격하였고, 또 과거 출신 관리 중 25%가량이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에 이미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었는데,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중략)
고려 귀족사회에서는 재추를 많이 배출하거나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일수록 더 격이 높은 문벌가문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고려 귀족들은 과거와 음서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그들의 특권을 유지해 가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일단 음서를 받아 관리가 된 다음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관리로서 출세하는 데 가장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 ‘제2부 과거와 음서와 학교’ 중에서
「권정평 묘지명」에 따르면, 권정평은 영가군永嘉郡(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증조부 한렴漢廉과 조부 장융長融은 호장戶長이고 아버지 경璟은 호장동정戶長同正으로 정조正朝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권정평 역시 향리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향리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그는 20세(1104, 숙종 9)가 되기 전에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남산도南山徒의 강신재講信齋에 입학하였는데, 남산도는 국자제주를 지낸 김상빈金尙賓이 세운 학교였다. 권정평은 그 뒤 진사2과에 합격하였고, 10여 년 뒤에는 어시御試에 나가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 제2인에 급제하였다.
향시에 급제한 20대 초반의 권정평이 상경하여 강신재에 입학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숙종 말~예종 초로 생각된다. 숙종은 권정평이 21세가 되던 1105년에 재위 10년 만에 사망하고 예종이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또 예종은 1122년에 사망할 때까지 17년간 재위하였는데, 권정평이 진사시와 어시에 합격한 시기도 아마 예종 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 ‘제2부 과거와 음서와 학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