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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고려시대
· ISBN : 9788933708088
· 쪽수 : 296쪽
· 출판일 : 2022-09-15
책 소개
목차
책을 펴내며
1부 배를 타고 어디로
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성격-
Ⅱ. 서쪽에서 태어나 동쪽에서 죽다
-귀화인의 수용과 활동-
Ⅲ. 최대경 댁으로 보냄
-물자의 생산과 유통-
Ⅳ. 님이여 송나라가 멀다고 말하지 마오
-송과의 외교와 문물 교류-
Ⅴ. 황천길은 멀고 먼데
-죽음, 장례 문화와 저세상-
2부 그들의 삶 속으로
Ⅰ. 뭇 아들들이 어느 결에
-윤인첨 처 한씨 부인의 영화와 슬픔-
Ⅱ.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최루백·염경애의 결혼과 부부애-
Ⅲ.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아버지를
-김광중의 죽음과 아들의 복수-
Ⅳ. 중이 되어 그 옷을 하루라도 입었다면
-승려의 출가·수계와 생애주기-
Ⅴ. 그의 호탕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조화와 타협 속의 여유와 웃음-
저자소개
책속에서
이들 몇 명의 사례를 들어서 조선시대 양반들이 모두 다 그러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사림士林 중에는 도가적인 삶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도 당연히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양반관료국가’라고 부르듯이, 지배층인 양반들에게도 과거 합격이나 관직 보유는 중요했다. 이를 통해서 양반들은 그 사회의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모든 길은 서울을 향해 있었다. 그렇지만 양반들은 기본적으로 재지사족이었다. 그들의 세력 기반은 연고지인 지방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중앙이라는 현실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도피’할 곳이 있게 마련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도 그들은 고향으로 운구되어 조상들 곁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들에게 ‘귀향’이라는 것은 곧 신분의 박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정서가 고향에서 서울로 불러 달라며 피맺힌 눈물을 흘린 것도, 정지상과 같은 젊은이들이 중앙의 관리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며 대동강 남포 포구에서 서러운 이별을 한 것도, 이들의 무덤이 고향이 아닌 개경과 그 주위에 정해졌던 현상도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고려사회와 조선사회의 지배층의 본질적인 차이를 말해 준다.
―1부 배를 타고 어디로, ‘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중에서
앞에서 언급한 「임광 묘지명」은 1152년(의종 6)에 만들어졌는데, 임광 역시 중국계 귀화인이다. 그의 묘지명의 ‘명’ 부분 첫 구절에는 “서쪽에서 태어나 동쪽에서 죽다”라고 그의 출신과 생애를 짧게 밝혔다. 그다음에 “다른 마음은 없고 오직 충성뿐”이라고 하여 고려에서의 그의 업적을 요약했다. ‘서西’와 ‘동東’, ‘충忠’이라는 세 글자로 그의 삶 전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서쪽 나라인 중국에서 태어나 동쪽 나라인 고려에서 죽은 그(또는 그들)에게 ‘충’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귀화인들은 고려에 연고나 기반이 없었다. 그들은 새 나라에 와서 관리로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역임한 관직을 보면,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특정한 업무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 업무는 귀족 세력보다는 국왕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국왕과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귀족관료가 아니라 전문관료라는 성격이 더 강했던 것이다. 한편 국왕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제3의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계 귀화인 출신 관리들이 고려 조정 내에 서 있을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그들이 새 나라에 충성을 바친다는 것은 다름 아닌 국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귀화인 관리들이 국왕과 가까워질수록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의 반발이 커지는 것도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서필徐弼의 경우이다.
―1부 배를 타고 어디로, ‘Ⅱ 서쪽에서 태어나 동쪽에서 죽다’ 중에서
고려의 지방조직이 현종 때인 11세기 초반에 완성되었으므로, 자기소도 이미 그 이전부터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중앙정부가 필요로 하는 질 좋은 자기를 구워 내는 자기소도 있었을 것이고, 지방정부나 사원, 민간이 필요로 하는 다소 질이 낮은 자기를 만들던 자기소도 있었을 것이다. 또 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많은 땔감이 필요했으므로 나무를 다 베어 내면 새로운 곳에 가마를 만들면서 자기소의 위치도 따라서 옮겨 갔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므로 지금 남아있는 문헌상의 기록만으로 자기소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최근에도 고려시대의 가마터가 새롭게 많이 발굴되고 있는데, 평안도·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전국 각지를 망라하고 있다.
국가에서는 특정한 자기소마다 일정한 양의 청자를 제작하여 공납하도록 하면서, 그릇의 종류, 형태, 무늬까지 지정했다. 청자에 새겨진 글씨 중에 ‘정릉正陵’·‘태묘太廟’·‘능실陵室’과 같은 왕실 관련 용어나, ‘상약국尙藥局’·‘양온良醞’과 같은 관청 이름 등이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말해 준다. 또 ‘기사己巳’·‘경오庚午’·‘신유 6월 일辛酉六月日’과 같이 간지나 날짜까지 적은 명문은 국가에서 특정한 시기에 맞추어 일정한 분량의 자기를 생산하게 했다는 뜻이 된다. 즉, 청자 생산에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한편으로 자기소에서는 사전에 주문을 받아 민간에 판매하는 자기를 만들기도 했다. ‘만덕万德’·‘청룡靑龍’과 같은 사원 이름이나 ‘범梵’ 자字를 쓴 청자와, 앞에서 본 이규보 시의 주인공인 김철의 녹자 술잔이나 이규보의 녹자 베개가 그런 사실을 말해 준다.
―1부 배를 타고 어디로, ‘Ⅲ 최대경 댁으로 보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