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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34981282
· 쪽수 : 392쪽
· 출판일 : 2023-05-17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아버지는 약한 불에도 세 단계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하룻밤 찬물에 우린 마른 멸치와 말린 고등어포를 ‘마키노’에서는 가장 약한 불로 조린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바로 불을 끄고, 내용물을 헝겊 주머니째로 꺼낸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당시 창고로 쓰던 2층에서 커다란 종이를 가져왔다. 첫째도 청결, 둘째도 청결, 셋째도 청결, 넷째도 청결, 다섯째가 맛과 영양, 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부터 수행이다. 밤에 가게 닫으면 주방 구석구석까지 번쩍번쩍하게 닦아. 스테인리스 선반, 벽, 조리대, 가스레인지, 육수냄비, 조리 도구, 환풍기 주변까지, 기름얼룩은 물론이고 먼지 한 톨 없게 씻고 닦아. 매일 밤이야. 하루도 거르지 말고. 영업중엔 설거지. 면기, 숟가락, 앞접시. 뭐든지 뽀드득뽀드득 씻어. 꾀부릴 생각은 말고. 손님 가시면 바로바로 카운터와 테이블을 깨끗한 행주로 닦아.”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이 숱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 아들, 몇 안 되는 친구.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는 멀리서만 봐왔는지도 모른다. 삼각형도 육각형도 멀리서 보면 전부 원으로 보인다. 아니, 너무 가까워서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고헤는 어쩐지 아쉬워 선뜻 떠날 수 없었다. 조금 더 그곳에서 백아白牙의 시리야사키 등대를 바라보고 싶었다. 안개 속에 서 있는 자못 우아한 자태가 한 인간의 기나긴 과거에서 온 이야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자리에서 침묵한 채, 바다를 나아가는 사람들의 생사를 지켜봐온 등대가 고헤에게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 보였다. 하늘색과 바다색과 안개 속에서 등대는 스스로의 빛깔을 지우고 숨죽인 듯 보이지만, 해가 지면 어김없이 불을 밝혀 항로를 비춘다. 숱한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저것은 조부다. 저것은 조모다. 저것은 아버지다. 저것은 어머니다. 저것은 란코다. 저것은 나다.
저것은, 앞으로 살아갈 내 아이들이며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다.
저마다 다채로운 감정이 있고, 용기가 있고, 묵묵히 견디는 나날이 있고, 쌓여가는 소소한 행복이 있고, 자애가 있고, 투혼이 있다. 등대는, 모든 인간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