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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사 일반
· ISBN : 9788936810405
· 쪽수 : 656쪽
· 출판일 : 2013-01-20
책 소개
목차
1장 주나라부터 진나라까지 고대 중국의 국가들
BC 1041년경 삼감의 난
BC 770년 제자백가 출현
BC 651년 규구의 회맹
BC 560~BC 530년경 《도덕경》의 탄생
BC 520 혹은 497년경 유가 학파 창시
BC 496년 오월의 싸움
BC 359년 상앙의 변법
BC 333년 합종연횡
BC 221년 진 시황의 대륙 통일
BC 214년 만리장성 축조
BC 213년 분서갱유
BC 209년 진승의 난
2장 한나라부터 수나라까지 천하의 분열과 재통일
BC 206년 홍문의 연
BC 195년 여후의 섭정
BC 154년 오초칠국의 난
BC 139년 비단길 개척
BC 136년 유가 국교화
BC 133년 마읍전투
BC 91년 사기의 완성
AD 8년 왕망의 신나라 개창
AD 17년 녹림·적미의 난
AD 68년 백마사 건립
AD 73년 서역으로 파견된 반초
AD 105년 채후지 제작
AD 166년 당고의 화
AD 184년 황건의 난
AD 200년 관도대전
AD 208년 적벽대전
AD 228년 제갈량의 북벌
AD 249년 고평릉 정변
AD 291년 팔왕의 난
AD 311년 영가의 난
AD 383년 비수대전
AD 420년 유유의 송나라 건국
AD 493년 북위의 낙양 천도
AD 523년 육진의 난
AD 587년 과거제 시행
AD 605년 대운하 건설
AD 612년 고구려 원정
3장 당나라부터 송나라까지 화려한 문화가 꽃피다
617년 이연의 거병
626년 현무문의 변
690년 무주혁명
745년 현종의 양옥환 귀비 책봉
755년 안사의 난
823년 우이당쟁
835년 감로의 변
875년 황소의 난
907년 후량 건국
960년 진교병변
1004년 전연의 맹약
1048년 활자 인쇄술 발명
1069년 왕안석의 신법
1087년 3당의 당쟁
1126년 정강의 변
1127년 대금전쟁
1162년 신유학 정립
4장 원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역사의 무대가 확장되다
1206년 몽골 통일
1271년 원나라 건국
1274년 원나라의 일본 원정
1351년 홍건적의 난
1380년 호람의 옥
1399년 정난의 변
1405년 남해 원정
1421년 북경 천도
1449년 토목의 변
1619년 살이호대전
1630년 이자성의 난
1661년 대만 수복
1662년 문자의 옥
1673년 삼번의 난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796년 백련교의 난
1840년 아편전쟁
1850년 태평천국 운동
1856년 애로 호 사건
1861년 신유정변
1862년 양무 운동
1884년 청불전쟁
1894년 청일전쟁
5장 개혁의 물결과 현대 중국의 성립
1898년 변법자강 운동
1900년 의화단 운동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 발족
1911년 신해혁명
1915년 신문화 운동
1919년 5·4 운동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1924년 제1차 국공합작
1926년 국민혁명
1934년 대장정
1937년 중일전쟁
1946년 국공내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1950년 한국전쟁
1958년 대약진 운동
1966년 문화대혁명
1972년 중미 정상 회담
1978년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
1989년 톈안먼 사건
1997년 홍콩 반환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리뷰
책속에서
장건은 두 번에 걸친 서역 원정을 감행했으나 한나라의 흉노 제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건이 가져온 대원의 명마 ‘한혈마(汗血馬)’에 대한 정보는 한나라의 기병이 강화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무제는 대원의 명마를 구하기 위해 이광리를 파견했으며, 기원전 101년에 이광리는 대원의 이사성을 함락하고 수천의 명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로써 강력한 기병을 갖게 된 한나라는 흉노에게서 서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원 정벌은 서역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게 하여 한나라 상인들은 서역과 직접 교류하기 시작했다. 서역에서 한나라로 유입된 것은 콩, 포도, 석류, 호도, 마늘, 수박 등이 있으며, 이러한 농작물들은 다시 황하, 양쯔 강 유역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또한 향료, 옥 같은 사치품과 목화, 양모 같은 생필품도 들어왔으며, 코끼리, 사자, 공작새 등이 들어와 사육되었다. 또한 서역에서 음악, 춤, 악기, 곡예 등이 전해져 한나라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한나라에서 서역으로 수출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비단이다. 비단을 수출함으로써 한과 서역의 교역로는 ‘실크로드’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비단은 서역 국가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었으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수백 년 후에는 로마까지 운송되었다.
비단길 개척으로 한나라는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국가들과 활발한 상업적 교류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단길에는 동서 간의 공식적인 경제 문화 교류라는 의미가 더해지니 이야말로 중국사에서 진정한 외교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_ BC 139년 비단길 개척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성립되기까지 전후 10여 년간, 특히 양제의 재위 기간에 중국은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수나라 말기에 봉기한 반란 집단은 10여 명 단위의 소규모 집단부터 몇십만을 넘는 대규모 집단까지 약 200여 개에 달했다. 원인은 양제의 동도 건설, 대운하 건설, 강도 유람, 고구려 원정 등 지나친 사치와 폭정에서 비롯된 가혹한 세금 징수와 부역 징발 때문이었다. (중략)
이연은 중국의 역사가 서위, 북주, 수나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지배층을 이루었던 관롱집단(關?集團)의 일원으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연의 어머니인 독고씨는 서위 8주국 독고신의 딸로 수 문제의 독고황후와 자매였다. 즉 양제와 이연은 이종사촌이었던 것이다. 613년, 양제는 고구려 원정 때 고구려로 도망친 곡사정의 친척인 홍화군의 유수를 파면하고 대신 이연을 임명했다. 이로써 이연은 섬서성에서 감숙성에 이르는 13개 군의 병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연은 천하의 주인 자리에 욕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향락에 빠진 것처럼 가장해 양제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중략)
이연은 3만의 군으로 대장군부를 구성하고, 배적(裵寂)을 장사, 유문정(劉文靜)을 사마로 임명했다. 군은 좌, 우, 중 3군으로 편성했으며, 좌군은 장남 이건성(李建成)이, 우군은 이세민이 통솔했다. 이연의 넷째 아들 이원길(李元吉)은 중군을 맡아 태원의 수비를 담당했다. 7월에 출병한 이연은 도중에 수나라 군대의 저항으로 곤경에 처했으나,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곽읍, 임분, 강군, 한성, 풍익을 차례대로 함락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장안을 함락했다. 당시 이연의 군대는 20만 대군으로 늘어나 있었다.
장안을 함락한 이연은 한 고조 유방이 관중에 입성했을 때 진나라의 악법을 폐지한 것을 본떠 수나라의 법률을 폐지하고, 군사의 약탈을 금하고, 국고를 폐쇄해 지도와 호적 등을 보존했다. 그리고 양제의 손자 양유侑)를 공제(恭帝)로 옹립하고, 양제를 태상황으로 추존하는 등 선양을 준비했다.
618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상황이 된 양제가 신임했던 장군 우문술의 장남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이연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공제에게 양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연은 자신이 당왕(唐王)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당, 연호를 무덕(武德)으로 정하고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당나라가 창업되었다.
_ 617년 이연의 거병
1986년과 1987년 사이, 몇몇 도시에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시위대 진압에 소극적 태도를 보인 후야오방을 향한 시위 진압 책임설이 대두되었다. 결국 후야오방은 당내 보수파 세력과 갈등을 빚다가 총서기직에서 사퇴하였다. 이에 총서기에 자오쯔양, 총리에 리펑(李鵬)이 취임하여 새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일련의 상
황을 통해 학생, 지식인 사이에 민주화, 자유화를 제약하려는 공산당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또한 정치 권력의 집중화로 관리들의 관료형 부정부패가 심화되자, 경제적 문제로 현실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와 주민들의 불만도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 정치 민주화에 우호적인 인물이자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15일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에서는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등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후야오방의 총서기직 사퇴에 대한 진실을 밝힐 것과 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베이징 대학생들은 보수파를 비난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고, 4월 17일에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보수파에 대한 재평가 및 부패 관료 타도를 외치며 가두 시위했다. 4월 21일에는 시위에 참여한 대학의 수가 10여 개로 늘어났으며, 저항 시인인 베이다오(北道) 등 47명의 학자들이 학생 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 이후 베이징 내 21개 대학의 대표자들은 효과적인 민주화 운동의 확산을 위해 지도 조직을 정비했다. 또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적은 종이를 들고 인민대회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총리 리펑과 관료들은 미온적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10만 명의 학생들은 톈안먼 광장으로 집결하여 후야오방을 추모하며 그의 이상주의가 현실로 실현되길 바랐다.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거행된 대학생들의 후야오방 추모 행사에서는 빈부 격차와 언론 자유에 대한 불만 등이 함께 표출되었다. 이로써 수십만 명의 학생과 노동자, 시민이 참가해 정치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되었다.
4월 26일, 정부는 시위대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하고, 덩샤오핑은 총리 리펑에게 강력한 조치를 취해 시위대를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5월 13일, 2천여 명의 학생들은 시위대를 대표해 단식 연좌 농성을 선언하고 톈안먼 광장에서 무기한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_ 1989년 톈안먼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