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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문학의 이해 > 한국문학론 > 한국비평론
· ISBN : 9788937412431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23-07-14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더러움’이 자긍심이 되도록 5
1부
새로운 페미니즘 서사의 정치학을 위하여 15
이것은 페미니즘이 아닌 것이 아니다 35
남성을 넘어, 여성을 지나, 떠오르는 레즈비언 ― 김멜라 소설을 중심
으로 54
‘진짜 페미니즘’을 넘어서 ― 윤이형의 『붕대 감기』가 페미니즘‘들’에
대해 말하는 방법 74
나는 여자가 아닙니까? ― 트랜스젠더 트러블 86
2부
무서운 소설, 무서운 아이들 97
여성과 폭력, 혹은 쓰레기 아마조네스 116
성적 순진함의 역설 ― 1990년대 여성소설의 섹슈얼리티와 성폭력 134
1990년대 은희경 소설의 섹슈얼리티 155
거울 속에서 아버지를 보다 ― 다시 읽는 오정희 179
3부
홀로 함께 있음, 도래할 시의 공동체 ― 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에 기대어 199
극장적 세계와 탈정념 주체의 탄생 217
황정은 소설의 환상과 리얼 ― 『百의 그림자』와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중심으로 235
변신하는 주체와 심리적 현실로서의 환상 ― 한강의 『채식주의자』 다시 읽기 259
4부
여성 작가 생존기 ―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의 삶과 문학 273
꽃은 지더라도 또 새로운 봄이 올 터이지 ― 나혜석과의 가상 인터뷰 293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 강경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303
5부
아직은 모른다 ― 권여선의 『아직 멀었다는 말』과 강영숙의 『부림지구 벙커X』 317
어떤 고독사(孤獨史) ― 구병모의 『파과』 읽기 327
권여선과 함께 레가토를 ― 거두절미식 인터뷰 340
어쩔 수 없이, 사랑의 불가능성 ― 구경미의 『라오라오가 좋아』 356
몰락이 우리를 구원할지니 ― 최윤의 『오릭맨스티』 371
저자소개
책속에서
성폭행 피해 여성만이 성폭력 문제를 말할 수 있고 이에 저항할 수 있다는 소설의 논리는 순정한 윤리적 주체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이는 지난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내부에서도 종종 발견되었다. 성폭력 피해 호소자의 고백에 근거해 끊임없이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신원 조회하고 그런 페미니스트만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만 간신히 자기 자신을 정당한 주체로 상상할 수 있는 네티즌 심판관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는 진정한 페미니스트 신원조회가 한편으로는 여성들 사이에 배타적 차이를 설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여성 공동체 내부의 차이를 삭제하는 이중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결국 폐쇄적인 자기만족적 게토로서의 여성 공동체에 대한 상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과연 글쓰기의 성별은 확인 가능한 것인가? 상징질서 안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된 모든 존재는 여성이 될 수 있나? 여기서 말하는 여성, 여성적 글쓰기는 현실에서의 여성, 여성적 글쓰기와 얼마나 먼가, 아니면 가까운가? 그렇다면 여성 리비도를 자신의 시적 전략으로 활용하면서도 여성혐오가 공존하는 ‘생물학적 남성’의 시는 여성적인가, 남성적인가?
문제는 이러한 ‘올바른’ 페미니즘에 대한 강박이 문학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올바른’의 내용은 각각의 문학적 성향이나 경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형식적·미학적으로 올바른 것일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올바르게 형상화된 여성 인물은 어떤가? 때로 이러한 ‘올바른’에 대한 요구는 올바르지 않은 형식이나 내용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그러나 재현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컨대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을 보자. 이 소설에서 일차적으로 눈에 띄는 사실은 주인공 강윤희가 친족 성폭행 피해 생존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에서 강윤희는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스스로를 가두는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성폭행한 삼촌의 아들 강민서를 돌본다. 어린 시절 성폭행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부인과 질환을 달고 살며 자기도 모르게 간헐적으로 밑도 끝도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성조숙증을 겪는 어린 딸과 조카 강민서의 교류를 지켜보며 성폭행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면서도 왜 강윤희는 강민서를 보살피는 것일까? 아픈 조카를 돌보는 일은 그저 침묵의 레짐인 가족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수행되어야 할 여성적 의무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나 나에게 이 고통스러운 돌봄은 상처받은 존재만이 지켜 낼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책무이자 인간적 존엄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재현은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