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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7439698
· 쪽수 : 292쪽
· 출판일 : 2019-02-28
책 소개
목차
여우의 빛 7
마이 퍼니 발렌타인 47
애플 시드 77
로커룸 119
야간 비행 153
드라이브 미 189
아케이드 217
프리마 돈나 245
작가의 말 271
작품 해설
이미지 소설과 삶의 관절_ 송종원 275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라이플의 스코프로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L은 그것이 내가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아 둔 돈이 정리되는 대로 비행기를 타고 북극으로 갈 것이다. 혼자 눈밭을 걸어간다. 그리고 적당한 언덕을 골라 자리를 잡은 뒤 오로라를 기다린다.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다. 다만 그 빛 아래에 누워 한때 듣던 음악을 떠올리거나 그동안 내 표적이 되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 보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럴 수 있을까? 북극에서는 오로라를 ‘여우의 빛’이라 부른다. 좋은 이름이다. L은 여우의 빛을 보기 전에 죽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럴지 모른다.
―「여우의 빛」
때로 꿈속에도 비가 내린다. 양철 지붕 위에 내리고, 옥상 장독대 위에 내리고, 버려진 구두 안에도 내린다. 듣고 있으면 내게 최면을 걸듯 입을 연다. 잡음은 길고 규칙적이다. 어느새 내 머리 위에도 비가 내려앉는다. 꿈은 거미줄처럼 이어진다. 비는 아주 단순한 선이다. 그 속으로 손을 내민다. 손금을 두드리는 빗줄기. 혈관을 두드리는 빗줄기. 손바닥에 비를 모은다. 둥그렇게 고인다. 입체가 된다. 손바닥을 얼굴 쪽으로 기울여 고인 빗물을 천천히 마신다. 비릿한 냄새를 코에 남기고 물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나는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눈물이, 콧물이, 오줌이, 땀이 되기 전까지 나는 그것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침마다 꿈속에서 마신 물을 버렸다.
―「아케이드」
어느 날부터 병실이 미세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간다. 나는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기울어진 곳의 끝에는 아마 어딘가로 연결된 구멍이 있을 것이다. 병실이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몸 안에 담긴 피가 내내 불안하다. 끊임없이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애써 균형을 잡으려 한다. 피와 함께 생각이 한쪽으로 뭉친다.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된다. 갑갑하다. 참을 수 없이. 맨몸으로 사막을 향해 걷는 여행자. 그 지친 발걸음과 메마른 목젖처럼 나는 어쩔 수 없는 갑갑함을 호소한다.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갈증을 느낀다.
―「프리마 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