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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37486180
· 쪽수 : 196쪽
· 출판일 : 2012-11-26
책 소개
목차
어릿광대의 나비
마쓰노에의 기록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나는 우선 ABC 노래를 적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떤 곳의 말이든 그런 노래는 존재한다. 혹은 숫자 노래부터 시작한다. 아니면 도레미 노래부터 시작한다. 마지막에 든 예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 아무래도 음계는 지역에 따라 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쓸 길이 없다. 이름이 있었던 것이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주위를 불러보면 펜이 움직인다. 아주 잠깐이지만. 조금 지나면 나는 방금의 그 감각을 잊어버리고 그 문장의 의미를 모르게 된다. 전에 썼던 문장을 그 지역에서밖에 읽을 수 없는 것처럼. 이렇게 쓴 문장이 다른 문장의 산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처럼. 시간 역시 공간과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내 손이 저절로 멈추고, 그래도 펜은 움직이고, 나는 깨닫는다.
이것은 모종의 저주다.
내 말을 굳어 버리게 하려는 종류의 저주로, 사고를 얽매고 피를 얼려 모세혈관을 막히게 한다. 그리고 나를 깨뜨리고는, 일관된 거짓 인생이 결정을 이루고 마치 숲처럼 쑥쑥 솟아오른다. 이어서 급격하게 회로와도 같은 가지를 뻗어 나를 휘감고 일어선다. 나무들 사이로는 낙엽처럼 어지럽게 춤추는 무수한 투명 나비들. 유리로 된 나비가 서로 부딪쳐 깨지며 상반된 요소를 지워 나간다. 끊임없이 솟아나면서 그런 족족 서로를 부정한다.
강한 바람 하나가 불어오며 유리 가루가 내 얼굴을 때린다. 머리카락을 흔들고 옷을 털며 주위를 둘러본다. 무기질적으로 펼쳐진 상실된 말의 나라에 나는 홀로 서 있다. 온갖 비유를 배제하고 놀랄 만큼 있는 그대로.
저택 현관홀에는, 에레모테리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높이 6미터에 이를 것 같은 거대한 골격 표본은 거대한 쇠 지지대를 안고 엉거주춤 일어나서 텅 빈 눈구멍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천창에서 비쳐 드는 일곱 가지 색의 흐릿한 빛이 대리석의 바둑판무늬 위에 드리운 그림자에 발을 디뎌 넣었다.
“에레모테리움.”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나를, 문을 닫고 불을 켠 여자가 돌아보았다.
“용케 아시는군요.”
“거기에.” 하고 내가 가리킨 곳에는 쇠기둥 받침대에 박힌 플레이트가 있었다. 거기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메가테리움과 에레모테리움의 차이를 알 이가 없다.
“나무늘보 아목 메가테리움과 에레모테이룸.”
나는 표기된 대로 읽었다.
“최신세에 살았습니다.”
여자는 갑자기 큐레이터 같은 말투로 말했다. 나도 기억을 더듬으며 관객의 입장에서 물어보았다.
“최신세라면.” “제4기네요.”
“제4기라면.” “신생대요.”
“신생대라면.” “현생대.”
밑도 끝도 없이 이름만 허무하게 이어지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항복했다. 그저 이름의 연쇄가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