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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한국고대사 일반
· ISBN : 9788943103965
· 쪽수 : 376쪽
책 소개
목차
머리말 ●004
도깨비 대장 비형랑 ●013
진지왕과 도화녀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도깨비 무리를 부리는 비형랑
여우로 변한 길달
비형랑과 용춘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사들 ●037
삼기산의 여우 귀신
퇴마사 밀본의 주술
교룡이 혜통에게 항복한 이야기
국난을 막아 낸 명랑의 문두루 비법
069 ●서동과 선화, 미륵 세상을 꿈꾸다
사리 봉안기, 미륵사 창건의 블랙박스
《일본서기》의 의자왕 정변 기사의 행간
지룡과 과부가 교통하여 낳은 아들 서동
서동과 선화, 결연에서 즉위까지
미륵사 창건 설화의 행간과 미륵 하생 신앙
전륜성왕을 꿈꾼 무왕, 진평왕을 벤치마킹하다
105 ●불국토의 중심축, 황룡사 9층탑
가섭불의 연좌석과 전불 시대 가람터
알지 못할 장륙존상 기사
황룡사 9층탑의 위용
황룡사 대종 조성과 황룡사의 의미
황룡사, 시로 남은 기억
137 ●산속의 두 수행자
광덕과 엄장, 같은 꿈 다른 길
살아서 부처가 된 두 사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나무들이 고개 숙여, 관기와 도성
점찰 신앙, 뼈를 바수어 서원을 세우다 ●175
벙어리 소년 사복, 입을 열다
비구니 지혜와 원광의 점찰 법회
진표와 점찰 계법 수행
진표의 189간자 점찰법과 미륵보살
점찰 신앙의 확산과 후계자들
거리로 뛰쳐나온 승려들 ●219
원효는 밥이다
원효와 대안
불지의‘새털’도령
원효의 광태
초지보살 새벽 스님
새벽 스님의 각설이 춤
후대의 시 속에 남은 원효
오대산의 오만진신 ●257
문수보살이 내린 범게
갈반지의 미친 거사
오대산의 두 태자
오만진신의 현신과 장천굴 굴신의 회개
오대산에 활짝 핀 화엄 만다라
291 ●깊은 산속 독경 소리
까마귀가 알려 준 소식
구름 타는 낭지 스님
시들지 않는 연꽃
썩지 않는 혀
321 ●대나무에 대한 기억
만파식적 이야기
백률사의 부례랑
죽지랑 개망신 사건
모량부와 사량부, 해묵은 악연
미추왕의 댓잎 군사
353 ●당나귀 귀 임금님의 속사정
헌안왕과의 문답
범교사의 충고
뱀이 몰려들고, 혀가 배를 덮다
당나귀 귀로 변하다
화랑들의 후원
남는 생각
리뷰
책속에서
1 도깨비 대장 비형량
진평왕과 왕비, 그리고 형제들의 이름은 모두 석가모니의 부모와 삼촌의 그것과 같다.
비형랑과 용춘은 결코 겹쳐서 조우한 적이 없다. 《삼국사기》에는 비형랑의 존재가 아예 흔적조차 없다. 《삼국유사》만으로 볼 때 이 두 인물은 겹쳐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비형랑은 바로 용춘이 아니었을까? 호방하고 낭만을 알며,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인물 진지왕은 부왕과 왕비가 머리를 깎고 승려로 살았던 극단적인 종교적 쏠림 속에서 용납되기 어려웠던 캐릭터였다. 하지만 신라 왕실의 개방적인 성 관념에서 보면, 그의 행동은 그다지 문제될 것도 없었다.
2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사들
부처가 세상을 뜬 후 1백 년 만에 태어난 인도의 아육왕이 불상을 주조하려다가 실패하고,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배에 실어 온 세계를 두루 다녔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지막에 황금과 철을 실은 배가 신라에 닿았고, 진흥왕이 마침내 이를 주조하여 불상을 완성했으니, 이것이 바로 황룡사의 장륙존상이다. 어디서도 성공하지 못한 불상 주조를 단번에 성공한 장소가 바로 문잉림 이었다.
문두루의 위력은 경악할 만했다. 난데없는 바람과 파도가 당나라 50만 대군을 실은 배를 일제히 침몰시켜 몰살시켰다. 이듬해에 다시 쳐들어온 5만의 당군 역시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물에 가라앉았다.
3 서동과 선화, 미륵세상을 꿈꾸다
지금까지의 정리로 새롭게 확인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자왕은 사탁 씨의 소생이 아닌 선화공주의 소생이다. 둘째, 의자왕의 생모 선화공주는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떴다. 셋째, 세자 책봉에서부터 즉위에 이르기까지 사탁 씨 왕비를 정점으로 한 집요한 반대가 있었다. 넷째, 의자왕은 사탁 씨 왕비의 서거 직후에 정변을 단행하여 사탁 씨 일가와 이들에게 찬동한 정치 집단을 추방함으로써 집권 초기의 불안 요소를 제거해 버렸다.
선화공주는 여전히 미륵사 창건의 계기를 마련했고, 그 일을 추진했던 주체다. 다만 그녀는 완공 훨씬 전에 세상을 떴다. 마지막 완공을 지켜본 것은 사탁 씨 왕비였다. 이것이 서탑 사리 봉안기에 그녀의 이름만 남게 된 연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