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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52113160
· 쪽수 : 648쪽
· 출판일 : 2012-04-10
책 소개
목차
화보
일러두기
추천사 | 박유철
머리말 | 유 진
[해제] 한국을 조국처럼 한국인을 동포처럼 사랑한 캐나다인, 스코필드 박사 자료 | 김승태
I. 일제 강점기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 및 기고문
1. 스코필드 박사의 일제 만행 보고서
01. 제암리 학살 만행 보고서(1919. 4)
02. 수촌리 학살 만행 보고서(1919. 7. 26)
2. 스코필드 박사의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 대한 영자 신문 기고문
01. 한국 사태를 조사할 제국조사위원회(1919. 7. 1)
02. 한국 민심의 파악: 일본의 가장 중대한 문제와 실패의 원인(1919. 8. 2)
03. 한국에서의 개혁 I: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도전 - 불가능한 정책(1919. 8. 26)
04. 한국에서의 개혁 II: 캐나다 혹은 아일랜드? - 조사의 필요성(1919. 8. 27)
05. 한국에서 행해지는 고문: 미즈노 박사가 해결할 문제(1919. 11. 29)
06. 한국에서 죄수들에게 행해지는 고문: 일제 통치 하에서의 죄악(1920. 1)
07. 한국의 개선책: 새로운 제도의 비평적이고 건설적인 조망(1920. 3. 12)
08. 한국의 개선책: 비평적 조망 II - 헌병경찰제도의 폐지(1920. 3. 13)
09. 한국에서의 개혁 III - 실패의 원인: 가혹한 통치 탓에 진정한 개선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다(1920. 3. 14)
10. 한국: 프랭크 헤론 스미스 목사에 대한 답변(1920. 4. 10)
11. 압제자의 멍에 아래 신음하는 한국: 서울의 한 의료인이 전하는 한국의 자유를 향한 부르짖음(1920. 7. 12)
12. 한국에서 일본의 개혁(1920. 7. 17)
13. 한국의 미래: 하라 일본 총리와의 인터뷰(1920. 9. 4)
14. 한국의 여성들은 ‘힘’을 가지고 있다(1920. 6. 7)
3. 스코필드 박사의 국내 신문 기고문
01. 한국 발전의 요결(1920. 4. 1)
02. 조선의 친구여(1) 캐나다로 귀국 중인 스코필드씨 편지(1926. 9. 17)
03. 조선의 친구여(2) 실행이 제일(1926. 9. 19)
04. 나의 경애(敬愛)하는 조선의 형제여?스코필드 박사 서한(1927. 1. 5)
05. 경애(敬愛)하는 조선 형제에게(1931. 12. 26)
II. 해방 이후 스코필드 박사의 기고문
01. 민심은 공포에 잠겨 있다 의사당 앞에 무장경관이라니(1959. 1. 3)
02. 의, 용기, 자유의 승리(1960. 4. 28)
03. 내가 본 한국혁명(1961. 1. 8)
04.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1961. 3)
05. 정직은 번영에의 유일한 길이다(1961. 4)
06. 나는 이렇게 본다. 한국의 군사혁명(1961. 6. 15)
07. 3·1 운동(1962. 3. 2)
08. 서울대의 문제점(1962. 12. 3)
09. 1919년 3월 1일과 1963년 3월 1일(1963. 2. 28)
10. 스코필드 박사, 박의장에게 서한(1963. 3. 23)
11. 3·1 독립선언기념탑 제막식에서 한 스코필드 박사의 축사(1963. 8. 17)
12. 나도 한국의 분신, 할 말은 해야겠다(1963. 9. 13)
13. 내핍은 수범(垂範)에서만(1964. 1. 16)
14. 사건의 전모 밝혀야(1964. 3. 3)
15. 나는 왜 돌아왔나?(1965. 1. 4)
16. 1919년 3월 1일, 삼일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1966)
17. 하나로 뭉친 독립만세(1969. 3. 1)
18. 3·1 운동은 한국 정신의 상징(1969. 3. 1)
19. 현대사조(1967~1969)
20. 한국 국민에 보내는 메시지(1970. 3. 1)
21. 스코필드 박사 병상 단상록(1970. 4. 16)
22. 박정희 신임 대통령을 위한 기도문(1963. 12. 15)
III.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회고
01. 석호필 박사의 최후 | 백난영, 전택부(1970. 5)
02. 고 스코필드 박사 간병 365일 | 태신자(1970. 4. 17)
03. 1919년 3·1 운동과 선교사들 | J. 어니스트 피셔(J. Ernest Fisher)(1975. 3)
04. 구두 밑창에 3·1 운동 사진 필름 숨겨 임정(臨政)에 전달 | 정환범(1997. 5)
05. 스코필드: 조선을 치유한 의사 | 정운찬(2004. 2)
06.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비범한 수의학자 | 더글라스 C. 메이플스던(Douglas C. Maplesde)(2005)
07. 국립묘지에 잠든 벽안의 애국지사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 | 이삼열(2006. 3)
IV.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연구 논문
01.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와 한국인의 민족의식 | 도레타 모티모어(Doretha E. Mortimore)
02.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의 영성 | 남태욱
03. “주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와 한국 독립운동 | 바바라 리걸트(Barbara Legault), 존 프레스콧(John F. Prescott)
04. 스코필드 박사의 의료(교육)·사회선교와 3·1 독립운동 | 이만열
부록
I. 원문
II. 스코필드 박사 연보
찾아보기 | 인명
§
리뷰
책속에서
스코필드가 ‘한국’에 대하여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은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인 1897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아버지는 1891년에 재혼을 하면서 더비셔(Derbyshire) 주의 ‘배즈로’라는 마을로 이사했다. 그곳의 선교사 양성 학교인 클리프 대학(Cliffe College)으로
이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897년 어느 날, 당시 클리프 대학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여병현(呂炳鉉)이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날 어린 스코필드는 여병현에게서 처음으로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들었다.
그 기사는 모든 중요한 부분들이 진실이었습니다. 그 진실은 적어도 23명이 총에 맞았으며 그 후 교회에서 불에 타 죽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의 명령에 의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실은 두 여자가 죽었으며, 한 명은 총에 맞고 다른 한 명은 집에 가라는 군인들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두 번의 칼질에 의해 몸에서 거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또한 진실은 군인들이 근처 공주에 있는 김씨 집에 가서 노부부의 세 아들과 세 손자인 여섯 명의 남자들을 끌고 나온 뒤 그들을 밧줄로 묶어 총검으로 모두 찔러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중 가장 어린 사람은 열다섯 살 난 소년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무릎을 꿇고 자식과 손자들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이것이 거부되자 그는 군인들을 향해 자신도 죽여 달라고 간구했고, 그 요청 또한 거절당했습니다. 군인들이 시체들을 불태우자 그 가여운 노인은 스스로 불더미로 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것조차 그의 마음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저는 그 노인을 봤는데, 그가 미쳐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한국인들에게 마침내 신문 발행이 허가되었다. 10년 동안 한국인들에게는 신문다운 신문이 없었다. 『매일신보』와 그와 비슷한 몇몇‘관보’는 진실을 왜곡하고 경찰 당국의 통제 하에 있었으므로, 의식 있는 한국인들은 일본 신문을 구해 읽지 않는 이상 신문을 아예 읽지 않는 편을 택했다. 아직까지 발행된 신문이 없으므로, 신문 발행 허가와 더불어 언론의 자유까지 보장될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신문 발행을 감독하는 경무총감은 상당한 자유의사 존중의 정신을 표명하였다. 일본 당국의 오랜 철천지원수인 한 정치적 망명자는 어떤 일간
지의 편집장 신분으로 한국에 귀국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또 다른 정치범도 사면을 받아 역시 같은 일간지에서 중요한 위치를 맡게 되었다.
총 세 종류의 신문 발행이 허가되었는데, 오직 하나의 신문 ―『동아일보』 ― 만이 한국인의 관심을 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