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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전기(개국~임진왜란 이전)
· ISBN : 9788952231703
· 쪽수 : 196쪽
· 출판일 : 2015-07-15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제11대 중종,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다
제12대 인종, 8개월의 짧은 치세로 생을 마감하다
제13대 명종, 권신 정치기의 절정과 쇠락을 맞이하다
제14대 선조, 사림 정치 시대를 열다
제15대 광해군, 난세를 이끌고 패륜의 멍에를 쓰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느 날, 이방원은 술자리에서 정몽주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하는 이른바 「하여가(何如歌)」였다. 이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하는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했다. 고려왕조를 배신할 마음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결국 정몽주의 태도는 그의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정몽주는 이원계(李元桂: 이성계의 형)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에게 이방원 측의 움직임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오히려 확실한 정황을 알아보겠다며 이성계를 직접 병문안했다. 이방원은 이때를 노려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오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공격했다. 정몽주는 조영규가 휘두른 철퇴를 맞고 쓰러졌다. 역성혁명을 저지할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가 죽고 석 달이 지난 1392년(공양왕 4) 7월 17일,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리고 백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조 500년의 새 역사가 열린 것이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은 이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이방원은 공식적으로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자의 지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이방원이 세제가 아닌 세자에 책봉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언뜻 보기에는 왕이 동생을 아들로 삼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조선왕조는 대대로 종통(宗統: 종가 맏아들의 혈통)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안 중 하나였다. 특히 후기로 갈수록 종법의 적용을 둘러싸고 정치 생명을 건 직언이 이어질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조선 초기는 아직 성리학이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종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략)
이방원이 세자가 된 숨은 뜻은 따로 있었다. 그가 형인 정종이 아니라 아버지 태조의 왕위를 직접 계승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되면 정종은 태조와 태종 사이에 그저 임시로 앉아 있었던 것이 된다. 정종이 오랫동안 묘호를 받지 못하고 ‘공정왕’이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남아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종은 사후 162년이 지난 숙종 대에 가서야 시호를 받고 정식 왕으로 인정받았다.
두 번째 대마도 정벌이 세종 때 단행되었다. 세종 즉위 초기는 태종이 병권을 쥐고 있었다. 태종은 자신의 치세 때부터 부국강병에 힘썼으며, 특히 계속되는 왜구의 침략에 맞서 각 도에 군함을 배치하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다. 그래도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들지 않자, 1419년(세종 1)에 대마도 정벌을 명했다. 자신이 병권을 지휘하고 있는 동안에 골치 아픈 왜구를 소탕해 세종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한 것이다. 태종은 유정현, 박은 등의 대신들에게 대마도 정벌 계획을 이야기하며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중략)
대마도 정벌군은 대비가 전혀 없던 왜구들을 기습 공격해 배 129척과 집 2,000여 채를 불태웠다. 또한 왜구 100여 명을 사살하고 중국인 포로 130여 명을 구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여러 장수가 전사하고, 100여 명이 넘는 군졸이 언덕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세종 즉위년에 있었던 대마도 정벌을 전적인 승리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이를 계기로 조선은 왜구와 평화 협정을 맺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전투가 길어져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대마도 도주가 강화를 요청했고, 이종무 역시 아군의 피해가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이에 응했다. 이종무는 7월 5일 대마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거제도로 돌아왔다. 이렇게 역사적인 조선의 대마도 원정은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