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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52234636
· 쪽수 : 252쪽
· 출판일 : 2016-08-24
책 소개
목차
아침을 여는 매혹의 시
제1부 인생
제발 개구리처럼 앉지 말고 여왕처럼 앉아라 / 시(詩) / 스승의 사랑법 /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 겨울밤 / 동물의 왕국 1 / 미카엘라 / 난독증(難讀症) / 옛 시인의 목소리 / 오만 원 / 경청 / 생일 / 검은 당나귀 / 면벽 23 / 부지깽이 / 늙은 꽃 / 물결 표시 / 지옥에서 보낸 한 철 / 황무지 / 목계(木鷄) / 디딤돌 / 한 번의 우연적 만남과 두 번의 필연적 만남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이렇게나 많은 새들이 / 슬픈 편대 / Don’t Cry 베이비 박스 / 소금 / 탁발 / 풀을 깎다 / 문 / 용접 / 난경難境 읽는 밤・2 / 밥 / 보살핌 / 희망은 외양간의 지푸라기처럼
제2부 사랑
풍문 / 격렬비열도 / 소네트 116 / 첫사랑 / 나의 손이 꽃잎을 떨어낼 수 있다면 / 아늑 / 초록 도화선을 통해 꽃을 몰아가는 힘이 / 새가, 날아간다 / 바람의 기원 / 할렘 강 환상곡 /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 / 남국에서 / 집시 / 합장(合葬) / 나비족 / 눈이 오시네 / 젖지 않는 물 / 푸른 곰팡이 / 오빠가 되고 싶다 / 아이의 질문에 답하기 / 봄의 노래
제3부 풍경
노마드 / 봄이 올 때까지는 / 난초 / 목련꽃 우화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진경(珍景) / 재생 / 미라보 다리 / 바다의 미풍 / 해 / 한 줌의 도덕 / 죽편(竹篇) 1 / 바티칸 비너스 / 눈가루 / 뻐꾸기 울음 / 강매역江梅驛 / 산수유꽃 / 이니스프리 호도(湖島) / 워낭 / 산숙(山宿) / 삼랑진역 / 나는 아침에게 젖을 물린다 / 옛집 마당에 꽃피다 / 아이들 / 파문 / 바위사리 / 매 / 두 개의 우산 / 숲 / 초사흘 / 앙코르와트 가는 길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스승의 사랑법
주대야
술 마이 먹찌 마라라 제발
몸도 안 조타 카민서
자아, 한잔 바다라
김주대,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2014
스승이 사라진 시대에 “자아, 한잔 바다라”라고 내미는 스승의 술잔은 말 그대로 ‘바다’다. 그 바다에서 퐁당거리는 제자는 외롭지 않다. 시간이 흘러 제자가 스승의 나이가 되면, 스승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때 바다가 되어 어린 제자들을 품는 자가 되지 못하면 얼마나 외로울까.
현대판 문인화로 요즘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주대의 시다. 이 시에서 김주대 시인과 대작하고 있는 사람은 그의 스승, 강우식 시인이다. 텍스트에 드러나 있지 않으니 그가 누구든 상관없다. 사랑은 이렇게 좌충우돌이고 모순이어서 늘 문제를 일으킨다. 문제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사랑은 위험을 껴안고 뒹군다. 아무도 그 미래를 모른다. 그래서 더 해볼 만한 거다. 안전한 섬에서 ‘정주(定住)’를 꾀하는 자들은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
창조는 규범(norm)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된다. 이 시는 문어(文語)의 문법을 해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술 한잔 받는 일이 “바다”로 커진다. 세계는 놀랍게도 항상 언어로 재구성된다. 거짓말 같지만, 상징계 안에서 물(物) 자체는 없다.
아늑
쫓겨 온 곳은 아늑했지, 폭설 쏟아지던 밤
깜깜해서 더 절실했던 우리가
어린아이 이마 짚으며 살던 해안(海岸) 단칸방
코앞까지 밀려온 파도에 겁먹은 당신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던,
함께 있어 좋았던 그런 쓸쓸한 아늑
아늑이 당신의 늑골 어느 안쪽일 거란 생각에
이름 모를 따뜻한 나라가
아늑인 것 같고, 혹은 아득이라는 곳에서
더 멀고 깊은 곳이 아늑일 것 같은데
갑골에도 지도에도 없는 아늑이라는 지명이
꼭 있을 것 같아
도망 온 사람들 모두가
아늑에 산다는, 그런 말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았던
당신의 갈비뼈 사이로 폭폭 폭설이 내리고
눈이 쌓일수록 털실로 아늑을 짜
아이에게 입히던
그런 내밀이 전부였던 시절
당신과 내가 고요히 누워 서로의 곁을 만져보면
간간한, 간간한 온기로
사람의 속 같던 밤 물결칠 것 같았지
포구의 삭은 그물들을 만지고 돌아와 곤히 눕던 그 밤
한쪽 눈으로 흘린 눈물이
다른 쪽 눈에 잔잔히 고이던 참 따스했던 단칸방
아늑에서는 모두 따뜻한 꿈을 꾸고
우리가 서로의 아늑이 되어 아픈 줄 몰랐지
아니 아플 수 없었지
민왕기, 「시인동네」, 2015 가을호
대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던 민왕기 시인은 오랜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시의 땅에서 떠나지 않았다. “깽판”인 세상에서 깡다구로 싸우다가도 그는 늘 “아늑”의 시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는 아늑의 아늑함과 아늑의 쓸쓸함이 겹치는 곳에서 유배 중이다. 거기에 폭설이 내릴 때 겁먹지 마라. “어린아이 이마 짚으며” “해안 단칸방”에서 살던 아늑이 우리를 다시 따뜻하게 데워줄 것이다.
삶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오죽하면 어떤 시인은 “나는 지뢰밭 위에서 잔다”고 고백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늘 피난처를 구한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 뭔가에 쫓길 때나 겁먹었을 때, “깜깜해서 더 절실”할 때, 나의 피난처는 어디인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는 “당신” 때문에 그나마 이 세상이 살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모든 “아늑”은 “쓸쓸한 아늑”이다. 결핍은 유한자(有限者)인 모든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핍과 유한성 안에서 분투한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장엄한 일인가. 결핍이 우리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