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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액션/스릴러소설 > 외국 액션/스릴러소설
· ISBN : 9788952769619
· 쪽수 : 584쪽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
“동기: 왕따 남학생이 자신을 놀리던 같은 반 친구에게 앙심을 품음.
흉기: 칼.
방법: 피고인이 직접 살인에 대해 서술한 글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음.
물적 증거: 피해자의 혈액으로 피해자의 몸에 찍힌 지문.
신사 숙녀 여러분, 증거가 너무나도 강력합니다. 증거가 산더미 같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 심리가 끝나면, 제가 방금 여러분에게 말했던 것을 모두 증명하고 나면, 본인은 바로 이곳 여러분 앞에 다시 서서, 이번에는 여러분에게 자신의 본분을 다 해주십사, 명백한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주십사, 여러분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인 유죄 판결을 내려주십사 요청할 것입니다. 장담컨대, 유죄라는 그 말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평생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배웁니다. ‘심판하지 말라.’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칩니다. 피고인이 어린아이일 때는 특히나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결백을 열렬하게 믿으며, 또한 믿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결백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결백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를 전부 보고 나면, 여러분은 이번 재판에 단 하나의 평결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유죄 평결입니다. 평결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 ‘진실을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본인은 여러분에게 바로 그렇게 해주십사, 진실을 말해주십사, 유죄 평결을 내려주십사 요청할 것입니다. 유죄. 유죄. 유죄. 유죄.”
라주디스는 단호하고, 정의롭고, 간절한 표정으로 배심원들을 바라보았다.
“유죄입니다.”
라주디스가 한 번 더 말했다.
라주디스는 비통하게 고개를 숙이고, 의자로 돌아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녹초가 되었거나, 생각에 잠겼거나, 죽은 소년 벤 리프킨을 애도하는 것 같았다.
내 뒤로, 방청객들 틈에서 웬 여자가 훌쩍거렸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와 여닫이문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법정을 뛰쳐나갔다. 나는 감히 뒤돌아보지 못했다.
내가 느끼기에 라주디스의 모두진술은 꽤 괜찮았다. 이제껏 내가 보았던 라주디스의 모두진술 중에 최고였다. 하지만 라주디스가 원하던 홈런은 아니었다.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왜 피고인이 범행을 저질렀는가?’ 배심원들은 이번 소송의 약점을, 한가운데에 뚫린 도넛 구멍을 분명히 감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검찰 측의 진짜 문제였다. 왜냐하면 공판 중에 검찰 측의 논거가 가장 강력해 보이는 때는 바로 모두진술을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모두진술에서는 검사의 이야기가 재판의 실체, 즉 무능한 우호 증인들, 숙련된 적대 증인들, 반대신문 따위에 손상되기 전이라, 오염되지 않고 반박되지 않은 상태로 배심원들에게 전달된다. 내 생각에 라주디스가 우리에게 기회를 남겨 준 듯했다.
“피고 측?”
판사가 말했다.
조너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에 나는 조너선이 백발이 성성한 육십 대의 나이에도 소년처럼 보이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조너선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조너선의 머리는 항상 헝클어져 있었고, 양복 단추는 풀어져 있었으며, 넥타이와 옷깃은 언제나 삐뚜름했다. 그래서 전체적인 옷차림이 마치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복을 입고 있는 남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조너선은 배심원석 앞에 서서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에 감겨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조너선은 발언할 내용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어딘지 모르게 주도면밀하기도 하고 산만하기도 했던 라주디스의 긴 모두진술이 끝나고 조너선의 흐트러진 자연스러움을 마주하니, 마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듯했다. 음, 내가 조너선을 존경하고 좋아해서 조너선을 도두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조너선은 말을 하려고 입을 열기 전부터도 라주디스에 비해 훨씬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고, 그러한 사실은 꽤나 중요했다. 숨 한 번 내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계산할 것 같은 라주디스에 비해, 조너선은 매우 자연스럽고 매우 편하게 행동했다. 후줄근한 양복을 입고 법정에 구부정히 서서 자신만의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집 주방 개수대 앞에서 잠옷 차림으로 무언가를 먹고 있는 남자처럼 편안해 보였다.
조너선이 발언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는 검사가 했던 어떤 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27. 공판 개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