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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동유럽소설
· ISBN : 9788955866315
· 쪽수 : 136쪽
책 소개
목차
1 · 009
2 · 013
3 · 127
역자 해설 · 131
책속에서
그것은 어림잡아 20장가량 되는, 급히 써 내려간 여인의 불안한 필체였는데, 편지라기보다는 수기라고 하는 편이 옳을 듯했다. 그는 혹시 첨부된 다른 글이 없는지 무의식적으로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봉투에는 편지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안에 든 편지의 내용물에도 발신인의 주소나 서명 따위는 없었다. 이상히 생각하여 그는 편지를 다시 손에 들었다. 편지 윗부분에 이름을 대신하는 첫마디로 ‘저를 결코 알지 못하는 당신께’라고 씌어 있을 뿐이었다.
물론 당신의 그 눈길은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그런 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을 볼 때의 그 눈길은 여인에 대한 당신의 타고난 친절함 때문에 아주 무의식적으로 부드럽고도 따뜻하게 우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13살이었던 저는 그것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저는 부드러움이 제게만, 저 한 사람에게만 보내지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저는 뜨거운 불기둥의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순간에 미성숙한 소녀 안에 있던 여성은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당신에게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신 방 내부, 당신의 세계, 늘 당신이 앉아 있던 책상과 그 책상 위에 놓인 몇 가지 꽃이 꽂혀 있는 푸른색 유리 꽃병, 당신의 옷장이며 사진들, 그리고 당신의 책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생활을 도둑질이나 하듯 재빨리 들여다보는 짧은 순간에 불과했습니다. 충실하기 그지없는 요한이 제가 방을 자세히 관찰하도록 놔두질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짧았던 순간만으로도 저는 방 전체의 분위기를 모조리 빨아들여 그것을 밤낮 없는 무한한 꿈의 뿌리로 삼았습니다. 바로 그때의 단 몇 분이 제 소녀 시절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