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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현대철학 > 현대철학 일반
· ISBN : 9788956609126
· 쪽수 : 260쪽
· 출판일 : 2015-07-27
책 소개
목차
클로드 카플리에의 서문
들어가는 글 삶의 의미에 대한 간략한 역사
1장 사랑 혁명―새로운 의미의 원리
2장 새로운 시대의 태동기에 바라본 정치―사랑 혁명에서 후세에 대한 생각으로
3장 교육과 예술의 정신에 대하여
결론 죽음은 유일한 걸림돌인가? 사랑은 유토피아인가?
책속에서
쉽지 않은 기획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압니다. 이러한 급진적 변화, 특히 우리의 일반적 생각을 여러 면에서, 특히 정치라는 틀 안에서 바꾸어놓은 근본적 변화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 자체가 지금도 어렵잖아요. 하지만 몹시 중대한 관건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이니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 책의 목표는 다음의 두 가지 핵심으로 명쾌하게 요약됩니다. 첫째, 어떻게 해서 사랑이 새로운 의미의 원리로 여겨지는가? 둘째, 사랑이 어떤 식으로 교육, 예술, 정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놓는가?
_「들어가는 글」 중에서
“인도주의의 기본 공식은 결국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나도 남에게 하지 말라’라는 정통적인 지침을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이 당하게 내버려두지 말라’로 변형한 거죠.” ‘남이 당하게 내버려두지 말라’, 이는 곧 무관심과의 투쟁이요, 실제로 사랑 혁명, 즉 현대적인 가족 형태의 부상과 직결된 오늘날의 인도주의의 특징입니다. 비록 잠시 잠깐일지라도 우리가 타자에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공감, 모르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의 팔자에 완전히 무관심할 수만은 없는 이 감정, 우리와 생활 방식이 아주 다른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기막힌 비극에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는 생각은 우리의 사적 영역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만개한 감정의 직접적 결과예요.
_「1장 사랑 혁명」 중에서
당신은 개인적 사랑과 사랑 혁명의 정치적 효과를 연관 지었는데요,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최초의 인본주의가 공감이라는 차원을 너무 간과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인본주의의 가장 드높은 표현을 제시했던 칸트조차도 그러한 우를 범했지요. 우리가 짐승이 아닌 이상, 전쟁에서 아이를 잃고 통곡하는 이라크인이나 아프리카인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도 저 입장이라도 저렇겠지 생각할 겁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 언어, 피부색, 종교가 달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똑같이 슬픈 일이니 완전히 무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요, 그 명령을 ‘존중’하기 때문에 무관심과 싸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칸트의 정언명령(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을 적용함으로써 싸우는 게 아니에요. 어떤 존중의 합리성이 아니라, 공감으로 자극받은 존중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공감의 궁극적인 뿌리는 현대 가족에서 탄생한 감정이에요.
_「1장 사랑 혁명」 중에서
나는 앞에서 ‘형이상학적이지 않은 인본주의’, 첫 번째 인본주의와 달리 니체와 하이데거의 해체주의적 공격에 무너지지 않을 인본주의를 구축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체험의 현상학으로 이해된 사랑이라는 원리는 분명히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닙니다. 이 원리는 니체와 하이데거가 수행했던 것 같은 전통적 휴머니즘의 ‘해체’에도 타격을 입지 않거든요. 왜냐고요? 너무 복잡한 논증을 끌어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말해두자면, 사랑의 경험에서 느끼는 타자의 초월성이 추상적 원리, 이상주의적 허상, 하늘이나 신에게서 뚝 떨어진 가치가 아니라 생생한 체험, 심지어 가장 자연스럽고 내재적인 체험이기 때문이죠. 사랑은 아름다움이 그렇듯 우리에게 일종의 초월성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나를 벗어나게끔’, 나의 자기 중심주의를 벗어나게끔 하는 그 초월성이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관계에서, 나의 감각적 주체성에 가장 뿌리 깊게 내재한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타자의 초월성, 타자성을 경험할 수 있지만 이 초월성은 여느 형이상학적 초월성과 달리 높은 곳에서, 코스모스나 신에게서, 심지어 실천이성이나 타자에 대한 합리적인 ‘존중’에서 오지 않습니다. 후설 현상학의 기본 명제를 빌려서 말하자면, 가장 은밀한 내재성 안에서만, 모든 언어들이 ‘심장(마음)’이라는 보편적 은유로 나타내는 곳 안에서만 이 초월성을 볼 수 있고 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_「1장 사랑 혁명」 중에서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넓게는 우리 뒤를 이을 어린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까요? 나는 이 문제가 지난 두 세기 동안 정치의 새로운 문제, 정말 유일하게 새로운 문제였다고 봅니다. 가령 환경 운동은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고려하고 나섰는데요, 잘 생각해보면 환경 운동은 프랑스대혁명 이후로 유일하게 새로운 정치 운동이었습니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직결된 결과입니다. 그러한 관심은 연애결혼이라는 혁명에서 비롯됐고요. 후세에 대한 관심은 사적 영역(가족 내에서 실현되는 감정과 그 감정의 대상을 신성화함)과 공적 영역(젊은이들의 미래, 나아가 인류 전체의 미래) 사이에 공통의 장을 열어놓았습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아이들에게 남겨줄 세상은 그 정의상 인류에게 넘겨줄 세상과 다르지 않죠. 그리고 우리가 어떤 정치적 방향을 택하든 우리 자식들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택한다면 그건 가장 적절하고 관대한 해법, 가장 심사숙고한 해법을 찾는 기준으로 꽤 믿을 만하지요.
_「1장 사랑 혁명」 중에서
내가 ‘정답’을 쥐고 있노라 말할 순 없습니다. 그건 매우 교만한 일일뿐더러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죠. (…) 그저 나는 그래도 사랑은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말했고요. 어쩌면 되레 그 모든 아픔, 혹은 그 모든 기쁨으로 인하여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고, 그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죠. 끝이 있다고 체념해야 할까요? 마지막 페이지를 맞닥뜨리기 싫어서 아예 책을 펼치지 않고, 마지막 음이 울리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바흐의 코랄을 마다하고, 화면에 뜨는 ‘디 엔드’를 외면하느라 영화 자체를 외면해야 할까요? (…) 집단적 차원에서도 사랑의 지혜가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앞에서 나는 얼마나 사람들이 이익보다 정념에 따라서 움직이는지 말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_「결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