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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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은 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다. 조상 중에는 페르시아만을 오가며 무역을 하다가 색목녀를 아내로 맞거나 이슬람교를 믿은 이도 있었지만, 이지 본인은 중국의 전통문화 안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훗날 노장과 선종, 기독교까지 두루 섭렵한 이력으로 그의 사상은 중국 근대 남방문화의 결정체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는 26세 때 거인(擧人)에 합격해 하남과 남경·북경 등지에서 줄곧 하급 관료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운남의 요안지부를 끝으로 퇴직했다. 이지는 40세 전후 북경의 예부사무로 근무하던 중 왕양명과 왕용계의 저작을 처음 접한 뒤 심학에 몰두했다. 나이가 들어 불교에 심취하고는 62세에 정식으로 출가해서 절에서 기거했다. 그는 유불선의 종지가 동일하다고 인식했고, 유가에 대한 법가의 우위를 주장했으며, 소설과 희곡 같은 통속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평론 활동을 폈다. 유가의 정통관념에 도전하는 『장서』를 집필했고, 공자가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경전을 해설한 『사서평』을 출간했으며, 선진 이래 줄곧 관심 밖에 있던 『묵자』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했다. 이렇듯 스스로 이단을 자처하며 유가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하고 송명이학의 위선을 폭로한 그에게 세인은 양쪽으로 갈려 극단적인 평가를 부여했다. 결국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있던 중 7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저작들은 명·청대의 가장 유명한 금서였지만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빌린 수많은 위작 또한 횡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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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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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청초 시기의 문학가. 자는 종자(宗子) 또는 석공(石公)이며, 호는 도암(陶庵), 접암(蝶庵), 고검노인(古劍老人)으로, 만년에는 육휴거사(六休居士)로 불렸다. 절강(浙江) 산음(山陰, 현재의 浙江省 紹興) 출신이다.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명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관직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으나, 희곡, 차, 그림, 여행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즐겼다. 명나라가 망한 후 산에 은거하며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글을 쓰며 생을 마감하였다. 대표작으로 ≪도암몽억(陶庵夢憶)≫, ≪서호몽심(西湖夢尋)≫, ≪석궤서(石?書)≫ 등이 있으며, 서호 주변의 경물을 담은 ≪서호몽심≫은 장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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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욱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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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우익(蕅益), 호는 팔불도인(八不道人). 명나라 말기의 사대고승 중의 한 분으로 선종, 교종, 율종의 조화를 중시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일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불교의 교리로 유교의 경전을 해설한, 『논어점정(論語點睛)』, 『주역선해(周易禪 解)』 등은 동아시아 종교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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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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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문학박사.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한국경학학회 회장. 한국경학 및 중국 주자학파와 양명좌파의 경학을 연구하였다. 근래 유교와 불교의 회통적 사유가 『논어』에서 구현된 양상을 연구하였다. 저서로 『조선중기경학사상연구』, 『동아시아의 논어학』, 역서로 『이탁오의 논어평』, 『일본논어해석학』 등이 있으며, 약 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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