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59137541
· 쪽수 : 272쪽
책 소개
목차
- 프롤로그
1부 : 평양 시절
부서진 기억
평양의 어린 망명자
무단이탈
모국어, 기억의 배반
사랑은 같은 세계의 사람들끼리 하는 것
증오의 싹
드디어 대학생이 되다
우리도 스스로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너는 쭉 평양에서만 살았으니까
베이징을 향해
바깥 세계와의 첫 만남
의심, 새로운 세계의 관문
이별의 시작
평양을 떠나며
2부 : 운명의 여행자
악마의 딸
거짓과 진실 사이를 걸어야 하는 운명
사라고사의 한인교회
낮은 데서 시작하기
평양에서 온 흑인 보모
자본주의 세계로 한 걸음 더
코리아라는 이름의 데커레이션
우린 같은 세계의 사람인가요?
평양,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아디오스 마드리드, 헬로우 뉴욕
성조기여 영원하라 VS 북조선 애국가
자유인의 조건
세상에서 가장 긴 희곡
서울을 꿈꾸다
인천공항에서 만나 백두산
서울, 일하는 사람들의 도시
세상에서 가장 먼 두 도시
또 하나의 고향
여행의 끝
- 에필로그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엄마는 우리 삼남매를 평양에 놔둔 채 혼자 적도기니로 떠났다. 적도기니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훗날 들은 얘기로는 그때 김일성 주석이 엄마에게 ‘거긴 지금 위험하니 평양에 머물 것’을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에겐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쿠바에서 공부하고 있던 큰오빠 에르네스토가 여름방학을 맞아 아무것도 모른 채 적도기니에 들어갔다가 쿠데타군에 붙잡힌 것이다. 엄마는 아직 어린 아이를 사지로 보내버린 피델 카스트로를 끝없이 원망하며 부리나케 적도기니로 떠나버렸다. 상황은 점점 다급하고 암울하게 흘러갔지만, 나는 우리 가족을 둘러싼 그 온갖 복잡하고 위험한 일들을 이해하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단지 며칠만, 몇 주일만 꾹 참으면 다시 아빠와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벨과 파코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당시 쿠데타 조짐을 미리 눈치 챈 아버지가 우리를 ‘형제의 나라’ 북한으로 피신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좀더 큰 다음의 일이었다. 우리는 망명 가족이었던 것이다.
“아니잖아. 마리벨, 아니잖아! 엄마, 나 스페인 말 못해서 그런 거야. 정말이야!”
나는 계속 조선말로 소리쳤다. 나는 억울하고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랐다. ‘모국어’를 뜻하는 영어 ‘mother tongue’는 내게 틀린 단어였다. 나는 엄마(mother)의 언어(tongue)를 전혀 몰랐고 엄마 역시 나의 언어를 몰랐다. 엄마와 딸이 마주보며 서로서로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발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마리벨이 나를 달래며 말했다.
“그래, 알아. 엄마가 잘 몰라서 그래. 네가 이해하렴.”
하지만 이미 내 가슴엔 상처가 크게 남아 있었다.
엄마와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마리벨이나 파코의 통역 없이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엄마와 내가 단둘이 있을 때는 당연히 침묵만 흐를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쿠데타의 충격 이후 실어증에 가까울 정도로 스페인어를 잊어먹게 되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나는 수다스러울 정도로 스페인어를 잘 구사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조선말 이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친엄마와 막내딸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 기막힌 상황으로 인해 결국 우리 사이엔 감정의 골이 생겨나고 말았다.
1989년 당시 평양의 젊은이들에게 임수경은 전혀 새로운 스타였다. 청바지에 면 티를 입은 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외치고 노래하는, 그야말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 시대의 영웅이었다. 그때 평양의 여대생들은 하나같이 임수경처럼 단발머리로 거리를 활보했다. 청바지도 입고 싶었지만 구하기가 힘들어 헤어스타일만이라도 따라한 것이다. 나 역시 틈만 나면 TV 앞에 앉아 임수경을 보고 또 봤다. 그녀가 개성에서 단식투쟁을 할 때는 나도 달려가서 동참하고 싶었다.
‘나도 임수경처럼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북조선의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평양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 ‘자연스러움’이 나는 너무도 부러웠다. 그리고 ‘솔직하고 거침없고 자연스럽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도 그때 알았다. 모두가 임수경 패션을 따라하기 바쁠 때 선화는 내게 엉뚱한 말을 했다.
“모니카, 우리도 저 친구처럼 스스로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