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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59139491
· 쪽수 : 508쪽
책 소개
목차
2000년 역전의 수주
2001년 착공
2002년 700T
2003년 레일
2004년 양륙
2005년 시운전
2006년 개통식
2007년 춘절
옮긴이의 글
리뷰
책속에서
타이베이라는 도시는 밤이 되면 거리의 냄새가 바뀐다. 스쿠터나 자동차의 소음이 줄어든 만큼 가로수들이 활기를 띠는지, 도시 전체가 숲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변한다. 실제로 런아이루나 둔화베이루 같은 큰 거리는 도로에 가로수를 심은 게 아니라 가로수 속에 도로를 만든 것처럼 보일 만큼 나무가 많아서, 밤이 되면 도시의 네온 불빛에 반사된 환상적인 남국의 숲이 떠오른다. 밤에 여기 런아이루를 걷다 보면 하루카는 왜 그런지 맨 처음 이 거리를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이미 육 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때는 설마 자기가 훗날 이 거리에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웨이즈는 젖은 티셔츠를 다시 짜서 운동복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스쿠터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아즈?”라고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웨이즈 앞에 조금 전에 본 스쿠터가 멈춰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구아바의 젖은 잎에 둘러싸여서 햇볕에 그은 가느다란 다리가 지면으로 쭉 뻗어 있었다. 웨이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즈 맞지? 나야, 나, 창메이친” 하고 여자가 웃었다. “어? 어, 어어? 아, 아아, 아메이?” 소꿉친구인 창메이친은 분명 잘 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메이친과 눈앞의 여자는 너무나 달랐다. 횡설수설 어물거리는 웨이즈에게 “왜 그래, 혀라도 꼬였니?”라며 메이친이 웃었다.
하루카는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에릭을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갔다. 구 년이라는 세월이 도려내져서 구 년 전과 지금이 잇닿은 것 같았다. 시간이 만약 리본 같은 것이라면 구 년의 길이를 잘라내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붙인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도려낸 구 년의 리본은 어디에 있을까. 하루카는 무심코 발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두 사람의 발밑에 잘라낸 리본이 떨어져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하루카는 크게 휘젓는 에릭의 팔로 시선을 돌렸다. 착각이라는 건 알지만 에릭이 그 손에 리본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카는 하늘하늘 흔들리는 리본의 다른 한쪽 끝을 잡으려고 반 발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흔들리는 리본은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