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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63570051
· 쪽수 : 200쪽
· 출판일 : 2010-11-09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에 부쳐
식민지 지배 청산이 없었던 일본의 전후 처리
1장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보상 문제
1. 아시아와 교류하면서: 풀뿌리 민중의 네트워크
2. 개인 보상은 가능한가
2장 일본 정부가 ‘해결 완료’라고 주장하는 배상이란
1. 냉전과 일본의 배상: 미국의 아시아 전략 속에서
2. 연합국의 배상청구권 포기: 필리핀은 저항했다
3. 아시아의 불만과 불안
4. 아시아에 대한 배상
5.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 연합국 포로와 민간인의 경우
3장 식민지 출신자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
1. ‘조위금’이라는 ‘돈’: 대만의 옛 일본병 재판
2. ‘원호법’에서 배제된 옛 일본 병사: 한국인의 경우
3. ‘군인은급’과 ‘원호법’
4. 국적에 의한 차별: 상이군인 · 군속
5. 석방을 요구하며: 조선인 전범
4장 강제 노동에 대한 보상 문제
1. 한국인의 소송: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었는가
2. 강제 노동과 임금: ‘시효’와 ‘국가무책임’의 벽
3. 미불금의 ‘몰수’: 조선인 강제 노동
4. 국가와 기업의 책임: 중국인 강제 연행
5장 재판정에 선 ‘위안부제도’
1. 민간법정의 ‘판결’
2. 강간과 ‘위안소’
3. 보상금
6장 전후보상 재판을 둘러싼 새로운 움직임
1. 보상 입법을 촉구하는 판결
2. 반응이 둔한 일본 정부
● 저자후기
아시아의 피해자들에게 그 외침을 듣다
도착하지 않은 '전사통지서'
도착한 두 장의 '사망고지서'
‘전후 처리’에서 소외된 아시아의 피해자
또 하나의 전쟁 재판
배제된 피해자
잘려 버린 아시아에 대한 배상금
전후보상을 생각한다: ‘사죄’로부터 ‘화해’로
· 역자 후기
· 전후보상 재판 일람
· 일본의 적국 및 단교국 일람
· 아시아의 독립과 일본의 배상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책속에서
일본의 또 하나의 전후 처리는 전승국에 대한 배상 지불이다. 전쟁에 진 나라가 피해자에게 배상을 지불한다. 이것은 패전국이 국제사회에 복귀하기 위한 전후 처리 방식이다. 패전국 일본에도 무거운 배상이 징수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의 재군비와 경제 부흥이 절박해졌다. 미국 국무성이 낸 ‘대일강화 7원칙?日講和七原則’(1950년 11월 24일)은 모든 교전국에게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포기하는 원칙을 밝히고 있었다.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은 반대했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배상 조항(14조)은 일본이 배상을 지불할 것을 승인하고 있다. 하지만 지불은 역무 · 생산물 공여 · 가공 배상 방식으로 제한되었다. 금전으로 지불해야 할 배상을 생산물이나 역무의 형태로 지불하게 함으로써 피해자의 손에 들어가야 할 배상금이 공장이나 다리, 호텔로 변했다.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은, 영국 · 미국 · 네덜란드 · 프랑스의 식민지, 중국에 대한 일본군의 침략은 재판했지만, 조선 · 대만의 식민지 지배는 심의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추궁되지 않은 식민지 지배―이것도 전후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크게 왜곡하였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청산없이 전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구가해 온 것이다.
도쿄재판과 같은 때 진행된 또 하나의 전쟁 재판으로, 포로의 강제 노동 · 학대가 엄격하게 재판되고 있었다. 미국 · 영국 · 오스트레일리아 · 네덜란드 · 프랑스 · 중화민국 · 필리핀의 7개국과 소련 · 중화인민공화국이 재판하였다. 이 재판은 포로 학대, 강제 매춘, 강제 노동, 억류된 연합국 민간인에게의 학대 등 30항목에 미치는 ‘통례의 전쟁 범죄’를 대상으로 하였다.
미국이 대일 원조를 하고 있는 한편, 극동위원회(FEC)는 맥아더 연합국군 최고사령관에게 피해를 받은 나라가 일본의 산업시설 일부를 배상 지불의 전도前度로 받을 수 있도록 지령하였다. 필리핀 · 네덜란드 · 영국 · 중화민국 등 4개국에 넘겨준 시설은 4만 3919대의 공작工作기계, 육해군 공창工廠의 철거, 조선造船, 철강의 접수 등 1억 6515만 엔(1939년 당시의 평가액)에 달하였다.
이렇게 배상의 지불방법이 변경된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의 대일 경제 원조에 대한 부담 문제였다. 미국은 일본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원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점령이 길어지면서 점령 경비가 커지자 문제가 되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아시아의 안전보장을 중시한 미국은 모든 교전국에 배상청구권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였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미국은 ‘대일강화 7원칙’(1950년 11월 24일에 전문을 공표)에 모든 교전국이 배상청구권을 포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미국이 일본의 배상 지불을 경감하고자 움직인 것이다. 그것은 일본 외무성이 ‘우리나라로서는 꽤 유리한 형국’이라고 안도할 정도로 일본 경제 부흥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 아시아의 냉전이 일본의 배상 지불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2010년 일본 정부는 국적을 이유로 한국인 피해자를 배제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 가운데 일본인이 만든 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회장 히라쓰카[平塚光雄])가 “앞으로, 같은 비참함을 경험하고 일본인 이상으로 고생한 한국 · 조선, 중국 · 대만에 살고 있는 옛 억류자들에게도 이에 상응한 조치가 취해져야한다고 생각한다”라는 요망서를 제출하고, 이후에도 함께 운동을 계속해 가겠다고 호소하고 있다.
일본인의 사망자는 호적에 사망한 사실이 기재되었다. 이에 따라 유족은 '전상병자 전몰자 유족 등 원호법(1952년 4월 30일 공포)에 의한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법률은 한국에 있는 유족은 물론 일본에 사는 조선 · 한국인의 유족을 배제하고 있다. 일본의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을 이유로 정부는 옛 식민지 출신자에 대한 전후 처리를 완전히 포기했던 것이다. 원호법 관련 법령에는 “일본국적자에 한함”이라는 국적조항이 붙어 나돌았다. 그것을 우리들 일본인은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