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아시아사 > 중앙아시아사
· ISBN : 9788964358009
· 쪽수 : 480쪽
· 출판일 : 2015-07-20
책 소개
목차
서문
PART 1 초원에서 세계로
1장 천하를 통일하다
제국의 탄생 | 칭기즈 칸의 후계자들 | 능력 있고 지적인 어머니 | 국적과 인종의 장벽을 허물다 | 가문의 영광
2장 기회를 모아 때를 기다리다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다 | 정주 문명에 다가가다 | 관용으로 제압한 종교의 대립 | 형의 위기 | 치열한 왕위 계승 전쟁
3장 일개 후손에서 제국 후계자로
아우를 끊어내다 | 점령지에서 마음을 얻다 | 이상적인 내조자, 차비 | 중국을 위한 ‘맞춤형’ 통치
PART 2 제국의 완성
4장 대제국의 영광을 지키다
‘야만의’ 정복자, ‘문명의’ 남중국을 얻다 | 고려를 정복하다 | 1차 일본 침입, 폭풍에 지다 | 중앙아시아의 도전
5장 지구상 최대 제국을 통치하다
13세기 코스모폴리탄 체제 | 경제부흥을 위한 차별 철폐 | 선택과 집중의 군사정책 | 몽골과 중국을 동시에 사로잡은 사법 시스템 | 유학자 참모들을 포섭하다 | 모든 종교의 보호자 | 마르코 폴로, 쿠빌라이를 찬미하다
6장 충돌하는 문화를 제국에 품다
문명의 조건, 문자를 만들다 | 문화를 꽃 피운 불간섭 원칙 | 회화의 혁명적 발전 | 장인을 귀하게 여긴 지도자 | 전통을 사랑한 세계주의자
PART3 스러진 대제국의 꿈
7장 초심을 잃다
믿을 만한 대신들의 쇠락 | 남송 통합을 위한 노력 | 대운하, 재앙의 물결 | 인플레이션과 백성 착취 | 사람 보는 눈을 잃다 | 후퇴하는 종교 관용 정책
8장 미완의 영광
욕심이 부른 재앙 | 잘못된 판단이 흥망을 좌우한다 | 반란, 흔들리는 통치력 | 칸 중의 칸이 스러지다
옮긴이의 말
쿠빌라이 칸 연보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리뷰
책속에서
그는 제안서를 올릴 것을 적극 권장했다. 관료 가운데 한 사람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책 제안을 담은 의견서를 올리는 사람은 그것을 봉투에 봉인하여 올린다. 그 제안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제안이 유용할 경우 조정은 충성스럽고 성실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의견을 올린 사람을 승진시키고 포상한다.” 동시대의 관찰자 왕운은 쿠빌라이가 조정의 심의에 참석했다고 말한다. 1261년 4월의 어느 일주일 동안 왕운은 국사를 논의하기 위해 쿠빌라이를 세 차례 알현했다. 그보다 더 영향력 있는 관료들은 칸과 더 자주 만났다. 초창기에 쿠빌라이는 조정과 나라의 발전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이 쿠빌라이는 1260년대 중반까지 북중국에서 사회 안정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그는 동생 아릭 부케와 중국인 반역자 이단과 맞서 싸우는 와중에, 몇 가지 중요한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고 자신의 대중국 계획에 내포된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농민, 장인, 상인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과 제도를 고안했다. 중국인이 져야할 납세와 부역 의무를 명확하게 했다.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지폐 사용을 활성화했고, 영토 내의 교통과 통신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역참을 설계했다. 과거 중국인들은 의사, 과학자 등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기여에 걸맞은 명망과 지위를 부여하거나 보상을 해주지 않았지만, 쿠빌라이의 조정은 그들이 기여한 바에 따라 최대한 보상해주었다. 그는 몽골적 요소와 중국적 요소를 포괄하는 혁신적인 군·사법 제도를 개발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특히 쿠빌라이는 후원을 통해 예술의 발전을 촉진했다. 마찬가지로 미술가들과 장인들에게 폭넓은 자유와 재량권을 허용함으로써 예술 분야에서 더욱 큰 혁신과 실험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장려했다. 그는 미술가에게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양식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의 정책으로 화가, 극작가, 도공이 번영을 누렸다. 스스로도 외국인이었던 쿠빌라이는 비중국계의 예술 양식이나 착상을 중국 예술에 도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네팔 장인 아니코에 대한 지원과 후원은 중국 건축에 티베트와 네팔 양식을 출현시켰다. 쿠빌라이는 중국계와 비중국계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전 세계의 통치자로서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