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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개척자들

유학의 개척자들

최대우, 이향준, 조우진, 정영수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8-12-28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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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개척자들

책 정보

· 제목 : 유학의 개척자들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철학
· ISBN : 9788968495793
· 쪽수 : 238쪽

책 소개

유학(儒學)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세 명의 중요한 유학자인 공자와 맹자 그리고 순자의 철학을 개괄적으로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유학의 기초 개념들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

목차

서문 / 4

공자의 철학
1. 공자(孔子): 삶과 사상 / 13
2. 배움(學), 가치와 의의 / 41
3. 서(恕): 동감(同感)과 공감(共感)의 이중주 / 53
4. 인(仁), 인간의 길 / 72

맹자의 철학
1. 시대와 생애 / 93
2. 본성론 / 107
3. 수양론 / 129
4. 정치론 / 153

순자의 철학
1. 생애와 시대 / 179
2. 인성론: 성악설 / 206
3. 수양론 / 228
4. 정치론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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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최대우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와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충남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전남대학교 명예교수다. 저서로는 『호남의 유학자들』(전남대학교 출판부, 2016, 공저), 『이제마의 철학』(경인문화사, 2009), 『정다산의 경학』(민음사, 1989, 공저), 『유학사상』(전남대학교출판부, 광주고전국역총서, 1992, 공저) 등이 있다. 역서로는 『유학의 개척자들』(전남대학교출판부, 2013, 공역), 『중국 현대 신유학의 자아전환』(전남대학교출판부, 2018, 공역), 『동의수세보원 역해』(경인문화사, 2012), 『유학사상(연보집성)』(한국 전산출판사, 광주고전국역총서, 1994, 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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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수 (옮긴이)    정보 더보기
조선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남대학교 철학과 BK사업단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에서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유가철학의 감정론과 그 현대의 의미를 연구하고 있으며, 재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재난인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유학의 개척자들》(전남대출판문화원, 2019), 《인물로 읽는 중국철학사》(전남대출판문화원, 2019), 《재난 시대의 철학》(역락, 2021)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이정외서》(발해그래픽스, 2019), 《돈효록》(한국문화사, 2019) 등이 있으며, 유가철학과 재난인문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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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 공자(孔子): 삶과 사상

공자(孔子, B. C. 551~479)의 성은 공씨(孔氏)이고,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노나라(魯) 추읍 출신이다.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학(儒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성씨 뒤에 붙은 ‘자(子)’라는 표현은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그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많은 제자들을 가르친 교육자였고, 제자들과 주고받은 말과 그의 행동에 대한 기록이 『논어(論語)』로 정리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관례적으로 만년에 육경(六經)―『시경』ㆍ『서경』ㆍ『예기』ㆍ『악경』ㆍ『주역』ㆍ『춘추』―을 수정 혹은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문헌학적으로 엄격하게 그의 저술이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의 생애에 대한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실린 「공자세가(孔子世家)」이지만, 고증학적 연구는 『사기』의 수록 내용에 불확실한 점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세상을 떠난 직후 노나라 애공(哀公)에 의해 ‘니보(尼父)’라고 소박하게 불렸지만, 훗날 ‘대성문성지성왕(大成至聖文宣王)’, 나아가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라는 신화적인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 마디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공자는 역사와 신화가 뒤얽힌 중층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아래에서는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공자와 그의 사상에 대해 개괄하고자 한다. 첫째 공자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를 낳았던 시대적 배경. 둘째 배움(學)의 가치와 의의. 셋째 동감과 공감의 이중주로서 서(恕). 넷째 인간의 길로서 인(仁)에 의해 도달되는 삶의 이상으로 낙천지명(樂天知命) 등이 그것이다.

1) 공자, 인물과 그의 시대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속하고, 춘추시대는 보다 넓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 불리는 역사적 기간의 전반기에 해당한다. 천추전국시대의 이전에는 주나라(周)의 역사가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진시황으로 대변되는 진나라(秦)의 짧은 역사가 놓여 있다. 즉, 공자는 주나라-춘추시대-전국시대-진나라로 이어지는 역사적 단계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시기를 살았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춘추전국시대는 B.C. 770년 주나라가 오늘날 시안(西安) 부근의 호경(鎬京)에서 낙읍(洛邑)―오늘날의 뤄양(洛陽)―으로 수도를 옮긴 해를 기점으로 삼는다. 주나라가 수도를 옮긴 이유는 B.C 771년 견융의 침입으로 인해 주나라 유왕이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종점은 진나라가 분열된 제후국들을 병합하는 데 성공한 B.C 221년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을 계기로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된다.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진나라(晉)는 B.C. 453년 조(趙)ㆍ위(魏)ㆍ한(韓)이라는 세 대부 가문에 의해 분할 독립되었다. 그로부터 50년 뒤인 B.C. 403년 이 분할된 나라들은 주나라 왕실로부터 공식적으로 제후로 공인을 받았다. 춘추시대의 유력한 제후국인 진나라(晉)가 그 하부세력에 의해 사라진 이 시기를 기점으로 후대의 진나라(秦)가 나타나기까지의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공자는 대략적으로 춘추시대의 중반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둘러싼 춘추시대와 그 직전의 주나라에 대해 개괄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훗날 인과 예(禮)라는 공자 사상의 핵심 낱말에 영향을 끼쳤던 두 가지 요소, 즉 사회 정치 체제로서 봉건제와 종법제, 그리고 은ㆍ주 교체기를 지나면서 나타난 천명관의 변화가 주로 언급될 것이다.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 왜 춘추시대에 대한 배경 설명만으로 불충분한가? 그것은 공자가 노나라를 매개로 주나라의 문화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나라의 고유한 정치제도인 봉건제에 의해 주공에게 주어진 제후국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자기 문화의 이상을 주공이 제정한 주나라의 예제 문화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 때문에 노나라와 주나라, 혹은 주공의 예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공자의 인식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제나라(齊)가 한 번 변화하면 노나라(魯)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 번 변화하면 선왕(先王)의 도(道)에 이를 것이다.

여기에서 공자가 말하는 ‘(선왕의) 도’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주나라의 예교를 가리킨다. 공자는 자의식적으로 주나라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생각을 공공연하게 표명했다.

주나라는 하(夏)ㆍ은(殷) 이대(二代)를 거울로 삼았으니, 찬란하다. 그 문화(文)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이러한 전제에서 볼 때 공자에게 주나라의 예교를 대표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주공이었다.

심하도다. 나의 쇠함이여! 오래되었다. 내 다시는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뵙지 못하였다.

이상과 같은 공자의 인식은 공자가 도대체 왜 주나라를 문화적 이상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주나라는 도대체 중국의 고대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그것은 공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주나라-주공-노나라-공자로 이어지는 고리를 따라서 이 질문에 대답해보자.
주나라는 대략 기원전 1046년에서 시작해서 기원전 256년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고대 국가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고대 국가는 하(夏)-은(殷)-주(周)의 순서로 나열되고, 그 가운데 주나라 이전은 거의 신화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관례였다. 19세기 말 은허(殷墟)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고고학적 증거들이 드러나, 오늘날에는 은나라―‘상나라(商)’라고도 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국가라고 인정하고 있다. 하나라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 구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대략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주나라는 은나라를 정벌하고 폭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천자국이 되었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은 주왕(紂王)이었고, 그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왕은 무왕(武王)이었다. 무왕의 아버지는 아들이 천자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왕으로 추대되어 흔히 문왕(文王)이라고 불렸다.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기여했던 두 사람은 무왕의 동생이었던 주공(周公)과 흔히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르는 강상(姜尙)―강려상(姜呂尙) 혹은 강자아(姜子牙)라고도 한다―이었다. 훗날 주공에게는 노나라가, 강태공에게는 제나라가 제후국으로 주어졌다. 주왕은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왕이 으레 그렇듯이 망국의 군주로서, 동시에 주나라의 대두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이유에서 역사적인 텍스트 속에서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사마천은 주왕이 총애했던 달기와 즐겼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사례를 「사기」, 「은본기」에 서술함으로써 그의 악행을 도드라지게 하는데 기여했다. 「봉신방(封神榜)」이라고 불리는 「봉신연의(封神演義)」는 바로 이 시기, 즉 은주교체기의 역사적 사건을 도가적인 배경에서 유ㆍ불ㆍ도의 삼교를 넘나드는 서사 구조로 각색한 명대의 통속 소설이다.
주나라의 문화에 대해서는 주공에 의해 저술되었다고 알려진 『주례』에 의해 대표된다는 것이 가장 전통적인 발상이다. 물론 오늘날 『주례』는 주공보다 훨씬 이후에 저술되었고, 그 저자 역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공자의 시대에는 『주례』의 저자로서 주공의 위상을 확고한 것이었다. 주공의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이고, 문공(文公)은 그의 시호인데 가장 흔하게는 주공이라고 불렸다. 그는 은나라를 정벌한 공로로 노나라의 제후가 되었지만, 아들인 백금(伯禽)을 대신 보내고, 자신은 호경에서 어린 성왕을 보좌하며 주나라의 안정을 도모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주공은 무왕의 어린 후계자였던 성왕(成王)을 대신해서 7년 동안 섭정을 하는 동안 그의 동생들이 연관된 반란을 진압했고, 몇 차례의 정벌을 통해 주의 영토를 확장했으며, 낙읍에 주나라의 동도(東都)를 세웠다. 특히 성장한 성왕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양도해서 공자에 의해 중국 고대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이 고사는 어린 단종을 폐위한 다음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사례와 곧잘 비교되었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제를 주공과 『주례』라는 텍스트로 대변했는데, 거기에는 나름의 내적인 이유가 있었다. 공자 사상을 요약하는 두 낱말인 인과 예가 주공과 『주례』라는 낱말의 이면에 포함된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한쪽에는 봉건제와 종법제라는 독특한 사회 정치적 위계 관계에 근거한 대인관계의 측면에서 나타난 관행적인 행동 양식의 총합에서 비롯하는 예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통치자의 덕을 거쳐, 인간 일반의 덕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진전을 추동한 천명관의 변화 과정이 있었다.
먼저 주나라는 은나라를 대신한 다음 독특한 두 가지 사회 정치 체제를 정착시켰다. 하나는 ‘봉후건국(封建侯建國)’을 줄인 표현이라고 알려진 봉건제(封建制)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혈연관계를 사회적 관계와 혼성시킨 종법제(宗法制)였다. 무왕은 개국 초부터 자신의 친족들과 태공망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주나라 이외의 영토를 나눠 주고, 그곳을 다스리면서 주나라를 지키도록 했다. 나눠준 영토는 점차적으로 제후의 나라(國)―즉 제후국(諸侯國)―로 변해갔고, 제후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봉건체제를 완성시켰다. 제후국은 천자로부터 나눠받은 직할지를 다스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시 후대에 세습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특혜를 누리는 대신에 제후국들은 유사시에 천자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고, 정기적으로 물자를 공납했다.
주나라나 제후들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도시국가로서 읍(邑)이었고, 그 읍들은 강한 씨족의 결합으로 연결되었다. 씨족들 사이의 위계 관계는 종법(宗法)이라는 기준을 따라서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혈통을 따라서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을 구별하고, 천자의 적장자만이 대종으로서 다음대의 천자가 될 수 있었다. 즉 천자의 적장자는 대종으로서 천자가 되고, 적장자가 아닌 아들들은 조祖로서 제후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 왕의 적장자들은 소종으로서 제후의 왕위를 세습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대종과 소종의 구분은 지배 집단에 속하는 모든 계층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천자ㆍ제후ㆍ대부ㆍ사는 모두 종법제에 의해 규제되었고, 결국 이 제도는 주나라의 전 시기를 관통하는 대규모의 통치 제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제도의 관념화는 『예기』, 「예운」에서 공자가 예로써 “천하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구절에 대한 주소에서 발견된다. 즉 여기에서 ‘천하국가’란 ‘천하의 국가’ 혹은 ‘천하와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천하는 천자에, 국(國)은 제후에, 가(家)는 경대부에 대응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관념을 이해하면 『대학』의 첫부분이 다음과 같은 서술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옛날에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는다.

『대학』에서 말하는 ‘집안’이란 보편적인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자-제후-경대부로 이어지는 주나라의 봉건제와 종법제를 따라서 위계화된 사회 구조를 따라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발언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서열과 위계가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망이 되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서열과 위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상호 접촉할 때, 서로 다른 행동 양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느슨하게 말해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사회 내에서 자신의 서열과 위상에 걸맞는 대인관계적인 행동 양식을 습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자가 어째서 예로서 천하와 국, 그리고 가를 바로잡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공자가 주나라 문화를 모범으로 삼고, 예를 강조했다는 것에 대한 서술일 수는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공자 사상의 진정한 요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인이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선언될 때 나타나는 것처럼 이 예는 어째서 인과 상호 연관을 가지는가? 다시 말해 공자는 단순히 예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와 다른 기원을 가지는 또 다른 한 관념의 변천사가 부가되어야 한다.
은ㆍ주의 왕조 교체에서 기인한 커다란 관념상의 변화가 존재한다. 그것은 천명관(天命觀)의 변화와 그에 따른 천인 관계의 변화된 양상이었다. 먼저 천명관의 변화란 무엇을 말하는가? 제나라 선왕은 맹자에게 이렇게 묻는다.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쫓아내고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였다고 하는데…신하가 그의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괜찮다는 뜻인가?”

이 질문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그 유명한 ‘일개 필부(一夫)’로서의 주왕이라는 발상이다. 여기에 담긴 천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바로 혁명론(革命論)이다. 혁명(革命)은 문자 그대로 ‘천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함축한다. 즉, 맹자의 말은 천명은 가변적이라는 생각의 적극적 표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원래 중국 고대사상에서 자연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즉 맹자의 생각은 지배의 최종 근거로서 불변하는 천명이라는 고전적 관념이 몇 단계를 거쳐 변화되어온 단계의 결론적 사유를 대변하고 있다.
가변적 천명이란 발상 자체를 생각해 보면 이 주장은 봉건 사회에서 양날의 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낡은 지배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이는 이것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반면에 새로운 지배를 구축한 이에게 이 낱말은 불온한 반역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렇게 천명이란 낱말에 불온한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한 이들이 바로 주나라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하였던 주나라 무왕이 군주였던 은나라 주왕을 몰아낸 역사적 사건을 정당화해야 할 필요성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서경』에 나타나는 은나라 시대의 천명에 대한 용례는 분명히 ‘영속하는 천명’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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