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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71057988
· 쪽수 : 580쪽
· 출판일 : 2011-07-30
책 소개
목차
해제
숙빈최씨궤연급정빈이씨사우치제문淑嬪崔氏?筵及靖嬪李氏祠宇致祭文
어제가견성御製可見誠
어제가긍자민기편자군御製可矜者民其便者君
어제가기御製可奇
어제가소御製可笑
어제가소음御製可笑吟
어제가소팔십이御製可笑八十二
어제가편작御製呵扁鵲
어제가회만회御製駕回萬懷
어제각금시御製覺今是
어제각동만회御製閣東萬懷
어제간지御製干支
어제간지흥회御製干支興懷
어제갈민御製渴悶
어제갈민오십구御製渴悶五十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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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책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치적을 담은 어제문업(御製問業)
[서지사항] 英祖 49年(1773)│寫本 壯紙 1帖(1折) 帖裝│31.8×18.1cm
[원문] 八旬事業 若問於予 心??然 其何以答
一則蕩平 自?二字 二則均役 效流緇徒
三則濬川 可垂萬歲 四則復古 婢類皆閑
五則?衆 子光後初 六則昨政 卽大典法
同年同月日 集慶書
[해제] 이 첩은 영조가 80세에 자신의 평생의 업적 여섯 가지를 자부한 율문이다. 본문 첫머리에 에 ‘八旬事業’이라 한 것으로 보아 80세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형식은 내외 4언 8구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을 보면 평생 사업에서 당쟁을 막으려던 탕평책은 스스로 부끄럽고, 군역을 공평하게 하는 균역은 승려에게까지 미쳤으며, 청계천을 준설한 준천은 만세에 남길 업적이고 여종의 공역을 없앤 복고(復古)로 여종이 자유로워졌고, 서얼에게 청요직을 개방한 서중(?衆)은 유자광(柳子光) 이후의 처음이며, 유용한 법만을 솎아 속대전을 편찬한 작정(昨政)은 바로 대전법이라고 하였다.
이 율문은 영조의 일반적 치적으로 일컬어지는 탕평, 균역, 준천 이외에 ‘복고’, ‘서중’, ‘작정’등을 자부하였음을 밝히고 있어 영조가 중시했던 정책의 면모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글이다.
- 1권
노년 건강에 대한 논의 건공탕 어제개건공(御製慨建功)
[서지사항] 英祖年間(1724~1776)│寫本 壯紙 1帖(3折) 帖裝│31.4×17.6cm
[원문] 彼建功 彼建功 果金冊 果金冊 建功聞 建功聞 惟爲信 惟爲信
其可? 其可? 爾果功 爾果功 予若此 予若此 今世人 今世人
抑何心 抑何心 猶自? 猶自? 衆皆聞 衆皆聞 敢若此 敢若此
誠可笑 誠可笑 呼建功 呼建功 ?見予 ?見予 嗟建功 嗟建功
聞此言 聞此言 自低頭 自低頭 首扁鵲 首扁鵲 年近八 年近八
左?十 右?十 掌務官 掌務官 敢揚揚 敢揚揚 爾百? 爾百?
於爾何 於爾何 可棍百 可棍百 豈循例 豈循例 於大道 於大道
會萬人 會萬人 快爾棍 快爾棍
同年同月日 慷慨吟
[해제] 이 첩은 내외 3언 30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구는 같은 어휘를 반복하여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영조는 건공탕의 공을 칭찬하면서 금책을 이룰 만한 공적이라 인정하였다. 건공탕의 명성에 대해 들었는데 과연 진실일까 의구심을 갖기도 했지만 건공탕이 자신을 회복시켰으니 공을 이룬 것임을 인정하였다. 자신이 이와 같이 회복되었지만 지금 자신은 마음을 누를 길이 없으니 오히려 혼자만 불쌍하다고 여긴다. 중인들이 건공탕의 명성을 듣고서 자신에게 계속 복용하기를 권한다. 영조는 건공탕을 부르면서 자신의 병에 마땅하다는 말을 들으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뛰어난 편작과 같은 내의원들은 나이 팔순에 가까운 자신의 병을 확실하게 잡지 못하고 건공탕에게만 공을 기대고 뽐내고 있다. 뺨을 치고 곤장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영조는 자신의 몸이 후련하게 낫지 못함을 강개하고 있는 것이다. 영조는 건공탕을 권하는 만인을 모아 놓고 건공탕에게 곤장이라도 치면 유쾌하겠다고 탄식하며 강개하여 시를 읊었다.
- 2권
80세에 자기 일생을 서술한 어제금팔순성명연(御製今八旬誠冥然)
[서지사항] 英祖 49年(1773)┃寫本 楮紙 1冊(16張) 線裝┃31.3×20.2cm
[원문] 今八旬誠冥然憶幼時若前生甲戌九月十三日昌德寶慶堂卽予初度日若問時卽寅時因此來詣宜春昌慶北建極東年?六歲初受封爵宗親府有司同年臘冬兼翌春正月仁政殿中?頭公服謝恩禮成癸未初九冠禮於通化門甲申十一吉禮於安國洞永安第十三丙戌受小學於師傅……(중략)
歲皇朝崇禎戊辰紀元後三癸巳季夏壬寅日書
予卽祚四十九年年八十歲癸巳春正月集慶堂令繪士先草資政召示仍命設都監爲善堂圖寫此豈爲予乎憶昔癸巳年景賢堂此亦繼述意也夫噫昨今記述予意誠千萬云爾
[해제] 이 첩은 영조 49년 6월 14일에 도사도감(圖寫都監)을 설치한 후에 감회를 적은 것으로 영조가 태어나면서부터 80세가 되기까지의 이력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1694년 9월 13일 인시(寅時)에 창덕궁(昌德宮)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다. 6세 때에 봉작(封爵)을 받고 9세 때 통화문(通化門)에서 관례(冠禮)를 치렀다. 1704년 13세의 나이에 길례(吉禮)를 치렀고 이 때부터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했다. 1709년 16세 때부터 주원도제거(廚院都提擧)의 관직을 시작하여 내외연(內外宴)에 참석하였다. 이후 여러 제사의 헌관(獻官)으로 참여했다. 숙종과 경종, 인원왕후(仁元王后)와 선의왕후(宣懿王后)를 모시던 일과 이들의 승하 후 보위에 오르고 정순왕후(貞純王后)와 가례(嘉禮)를 올렸던 일까지 연대 순으로 빠짐없이 기록했다. 또한 중전과 함께 참여한 행사를 서술했고 1773년에 영조 자신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도사도감을 설치한 시점까지의 이력을 모두 기록했다. 이 글은 실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영조의 내력까지도 파악할 수 있고 사건마다의 영조의 감정과 생각이 드러나 있어 영조의 이력을 구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하겠다.
-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