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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한국정치사정/정치사 > 제3공화국/제4공화국
· ISBN : 9788971995099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12-11-26
책 소개
목차
추천사 1-고상만 선생, 참으로 고맙소(정연주, 전 KBS 사장)
추천사 2-검은 구름 흩어지면 밝은 달 절로 드러난다(명진, 전 봉은사 주지)
프롤로그-나는 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나
37년 만에 나타난 장준하의 엄숙한 외침
장준하 관련 기록 2074년까지 비공개? 내가 책을 쓴 이유!
1장 독립군 장준하 대 친일파 박정희
장준하를 처음 만나다 /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박정희는……”
장준하,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 연인을 위해 일본군 징집을 선택한 장준하
일본군 탈출 후 임시정부를 향한 6,000리 대장정 / 장준하, 『사상계』를 통해 언론인으로 서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격돌은 운명 / 장준하의 두 번째 구속, 정치의 길로 접어들다
돈 없는 장준하의 선거운동, ‘사탕과 손수건’의 비밀 / 편치 않은 정치인의 길
박정희의 영구집권 계획을 폭로한 김대중 /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던 박정희, 그가 지킨 약속은……
민주주의와 인권 압살, ‘유신시대’의 개막 / 긴급조치 남발, ‘거대한 감옥’으로 변한 대한민국
장준하를 석방하라, 미국 정부의 압력
2장 장준하 사건 조사관이 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인권 관련 업적 세 가지 / ‘교수의 양심’ 최종길 교수가 맞이한 참담한 최후
1973년 10월 19일, 중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 의문사위원회가 규명한 사건들
1986년 서울대 김성수,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의문사 첫 번째 담당 사건, ‘남현진 이병 의문사’ / 구타 진술을 은폐한 군 헌병대 수사
헌병대 수사관도 믿지 않는 ‘구타 없는 군대’ / 밝혀진 남현진 이병 의문사의 진실
당신이 맡을 사건은 따로 있소 /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 되다
3장 장준하 사건은 왜 의문사인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를 본 사람들 / 장준하 사건에 얽힌 ‘오해와 진실’
구당 김남수의 장준하 치료설? / 김남수는 왜 장준하를 치료했다고 주장했을까?
장준하 사건 조사팀이 세운 세 가지 원칙 / 답은 늘 쉬운 곳에 있었다
폐기된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라! / 극적으로 찾아낸 장준하 의문사 관련 기록들
사라진 ‘1시간 7분’ 증언, 녹음테이프를 찾다 / 국가와 민간 전문가를 동원한 음성 복원 싸움
사건 후 3일간 행적이 묘연한 목격자? / 김용환, 그는 왜 사실이 아닌 신원보증을 말하나
김용환, 그는 누구인가 / 직업 없이 무슨 돈으로 살았을까
1971년 이후 사라진 김용환이 다시 장준하에게 나타나다
4장 목격자 김용환, 그에게 묻다
김용환은 정말 목격자인가? / 장준하는 정말 군인 두 명을 만났을까
장준하의 약사봉 산행은 과연 사실일까 / 최초 공개, 1975년 8월 20일 김용환은 뭐라고 말했나
장준하는 나무를 잡은 사실이 없다? 목격자의 ‘반란’ / 사건 직후 사라진 목격자의 미스터리
사라진 그가 다시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 / 장준하는 약사봉을 등반하지 않았다
장준하는 정말 벼랑에서 추락했나? / 사라진 보안사령관 직보 문서
유족에게 걸려온 괴전화의 정체를 추적하다 / 중앙정보부 ‘중요 상황 보고’에 적힌 괴전화의 주인공
괴전화를 했다는 김용환의 분노, “모두 조작이다” / 괴전화를 부정한 이유, ‘새로운 늪’
김용환은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다? / 김용환의 ‘특수인물 존안 카드’-
‘박정희’의 9년 3개월 비서실장, 김정렴을 만나다 / “장준하가 누구지?”, 생각지도 못한 김정렴의 반격
뜬금없는 김정렴의 발언, ‘긴급조치 10호’와 김재규의 비밀
김정렴이 들려준 ‘박근혜와 구국선교단’, 그리고 진실 / ‘무소유’ 법정 스님이 말하는 장준하의 거사
장준하의 거사를 알고 있었던 중정 / 1975년 7월 29일 김대중과 장준하는 왜 만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해준 ‘조언’ / 2004년 3월, 의문사위원회는 왜 시국성명을 발표했나?
감사원으로부터 받은 시국선언 배후 조사 / ‘개구리 소년’ 법의학자, 마지막 희망을 쏘다
에필로그-장준하 사건은 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나
장준하 사건 재조사를 위해 선택한 ‘진상규명 불능’
7인 위원의 표결, 그 결과는……
장준하 사건 ‘인정’ 의견, 한상범 위원장 ‘소수에 또 소수 의견’
이 세상 또 다른 두 사람 위해 진실 가려야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내가 작성한 ‘진정 제7호 장준하 사건 종합 보고서’ 말미에 남긴 두 가지 숙제 중 하나였던 장준하의 유골에서 명백한 가격흔이 발견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명백한 타살 의혹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당연히 재조사를 수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거부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일이 묘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장준하의 유골이 세상에 알려진 바로 그 직후부터 조금씩 그런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재조사를 반대하는 새누리당이 진실과 다른 말로 사실을 왜곡하고, 나아가 그러한 잘못된 사실을 들어 장준하의 의문사를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 무엇보다 내가 화가 났던 이유는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주장을 근거로 장준하의 의문사 의혹을 배척하려는 모습이었다. “장준하가 추락 실족사하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는데 무슨 의혹이 있느냐?”며 “이미 지난 정부하에서 실족 추락사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까지 다 조사하고 이후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하고도 이를 또 조사하자는 것은 정치적 목적 외에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 보고서를 내가 봤다”라는 말까지 곁들였다. 그들이 봤다는 문제의 ‘장준하 보고서’를 직접 쓴 나로서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이 말기로 치달을 때였다. 일제는 결혼하지 않은 조선의 여인들을 이른바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징발해 전쟁터로 보냈다. 장준하 역시 소문으로 정신대가 운영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김희숙으로부터 자신 역시 정신대로 징발될지 모른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그 순간이었다. 장준하는 자신이 김희숙을 사랑하고 있음을 운명적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떡해서든 김희숙이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그는 결심했다. /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김희숙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만 정신대로 끌고 가는 것이니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4년 1월 5일. 장준하는 적지 않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연인 김희숙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사람들은 장준하에게 지금 귀국한다면 ‘김희숙은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겠지만 대신 당신이 죽을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지인들의 걱정이 장준하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다. / 장준하를 폄하하려는 이들은 그가 일본군으로 징병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입대했다며 그의 명예를 훼손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 지켜주고자 하는 연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는 이 아름다운 일화에 대해서는 굳이 외면한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장준하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박정희의 유신이 더 큰 비난을 받아야 할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전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유신은 홍사덕의 주장처럼 수출 100억 달러 달성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의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이 밝힌 것처럼 그저 “전 국민에게 구걸하듯 표를 달라고 하기 싫었던” 박정희가 이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 귀찮아 유신독재를 공포한 것뿐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영원한 권력을 세우겠다는 ‘더러운 욕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 특히 박정희와 관련된 선거 관련 야사 역시 그렇다. 박정희가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이 선거에 출마하여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김일성은 이렇게 힘들게 선거운동을 하지 않는데 왜 자신은 이렇게 힘들게 운동을 해야 하는지 내내 불만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김일성의 경우 자신을 비난하는 야당 후보도 없었고 또 힘들게 전국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이 늘 100퍼센트 지지로 선출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박정희는 종종 “내가 북한의 김일성보다 뭐가 부족하다고 대통령 선거 때마다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불만을 완벽하게 해소하기 위한 조치가 바로 유신독재 선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