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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일본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75279072
· 쪽수 : 315쪽
· 출판일 : 2010-07-16
책 소개
목차
1
2
3
4
5
6
7
맺음말_[거꾸로 서는] 미술관
<거꾸로 선 탑의 살인>에 나오는 예술가들
리뷰
책속에서
설거지를 끝내고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사에다의 서랍을 열고 잠시 멈칫한 것은 책 표지에 공작 그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공작 깃털 무늬를 도안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이외에는 비슷한 게 없었다. 안을 열어 보니 직접 쓴 글들이 있었다. 틀림없다. 제목도
저자 이름도 없었다. 사에다의 일기인가? 하지만 얼핏 봐도 앞의 것과 뒷부분의 필체가 달랐다. 함부로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에다의 이부자리를 깔아놓고 아래층 거실로 내려왔다. 피곤에 지친 듯 쓰러져 있던 사에다가 몸을 반쯤 일으켜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펼쳐진 다음 페이지를 넘겨서 내게 보여주었다.
덩굴장미 무늬로 장식된 틀 안에 제목이 쓰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무늬도 제목도 모두 손으로 직접 쓴 것이었다.
“읽어 봐!”
사에다가 말했다.
책장을 넘기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알아보기가 어렵네. 대체 누가 썼는데? 사짱은 아니지?”
사에다 글씨는 정자체라서 읽기가 쉽다.
“타락녀야.”
사에다가 말했다.
“처음 부분은. 그 다음은 코우즈키 언니! 그리고 그 다음은 나!”
나의 욕망은 커지고 있다.
신의 사랑을 성서의 그리스어 원전에서는 아가페라 이르고, 인간의 사랑ㅡ육체를 포함한 사랑ㅡ은 에로스라고 부른다.
‘'사랑’이라는 말은 정반대되는 두 가지 감정을 포함한다. 신의 무한한 자
애, 신에 대한 숭고한 경애, 신의 사랑을 인간에게 전하려고 하는 무사의 헌신. 그런 것들을 의미하는 아가페에 비해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는 힘은 착란으로 빠지거나 때로는 야만적인 사랑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어느 쪽이든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사랑이 마치 존경하는 마음이라도 되는 양.
이 나라에 와서 비로소 알았다. 육십여 년 전, 빗장을 걸고 유럽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이 나라를 강제로 열기 전까지, 이 작은 섬나라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서구의 사상이나 문명을 거의 접하지 못한 이 작은 나라는 독특한 감정 표현 방법을 갖고 있다. 사랑은 옛날부터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불교와 함께 들어온 말로 번뇌와 측은을 의미한다. 가엾어 하는 마음에는 슬픔이 내포되어 있다. 자비라는 말은 형이상학적 사랑 즉, 아가페를 뜻한다. 여기에도 역시 슬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자네는 어떻게 열쇠를 갖고 있지?”
그의 물음에 미나모는 예의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필요가 없으니 선생님께서 필요하시면 드릴게요.”
그의 손에 빛바랜 열쇠가 놓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나모는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사무실에 갖다 주면 되나?”
그가 침실에서 나와 계단 위에서 물었다.
“아닙니다. 남는 열쇠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미나모는 뒤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로스탕 선생님이 A호실로 옮기신 건 여기에 거꾸로 서는 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그는 큰소리로 되물으며 계단을 내려가려다 멈칫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미나모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전에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다. 거울 속에 비친 미나모를 보았을 때 느꼈던 기묘한 감각.
“전 배신당했어요.”
계단 아래서 미나모가 말했다.
“기이에게?”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니요. 제가 사랑한 상대한테요. 그래서 로스탕 선생님한테 벌을 받았어요. 선생님은 저를 거꾸로 서게 했습니다. 저는 미쳐버렸습니다.”
움찔하는 그에게 미나모가 말을 이었다.
“저는 저를 배신한 상대를 미치게 할 작정입니다.”
한참 만에 그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했을 때는 이미 미나모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