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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외국 역사소설
· ISBN : 9788976042118
· 쪽수 : 300쪽
· 출판일 : 2015-01-20
책 소개
목차
책속에서
아곤은 노승의 주의를 듣고는 창을 든 손을 내렸다. 하지만 무사시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그는 노승의 말을 잊어버린 듯 소리쳤다.
“무슨 소리!”
아곤은 창가에서 사라진 노승을 무시하며 다시 창을 고쳐 잡았다. 그런 그에게 무사시가 확인하듯 말했다.
“준비되셨는지요?”
무사시의 말은 아곤의 화를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아곤은 왼손 깊숙이 창을 부여잡더니 마루를 박차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강철같이 무거운 근육을 지닌 그의 발이 지면에 떠 있는 듯하여 흡사 물결치는 강물 속의 달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반면에 무사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듯했다. 목검을 일직선으로 잡고 있는 모습 외에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자세였다. 오히려 육 척에 가까운 키 때문에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근육도 아곤처럼 울퉁불퉁하지 않았다. 단지 새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지나치게 검지도 않았고 그 속에 피가 스며든 것처럼 호박색을 띠며 투명했다.
아곤은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떨쳐 내려고 한 것인지, 귓가에 맴도는 노승의 말을 떨쳐 내려 한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곤은 계속해서 위치를 바꿨다.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도발하면서 허점을 노렸다.
돌연 아곤이 창을 찌르며 들어간 순간, 고함 소리가 도장 안에 울려 퍼졌다. 무사시는 이미 목검을 높이 쳐들고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곤의 주위로 우르르 몰려든 중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곤이 내던진 창을 밟고 넘어지는 자가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약탕, 약탕을 가지고 와라!”
창가에서 모습을 감췄던 노승이 문으로 돌아 들어오는 사이에 일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노승이 허둥지둥 달려가는 자들을 말리면서 말했다.
“약탕도 소용없다. 그걸로 소생할 정도라면 애초에 말리지도 않았을 게다. 바보 같으니라고.”
무사시에게로 바싹 붙어 서서 그의 안색을 살피는 단바치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무사시는 손가락으로 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연기에 요기妖氣가 서려 있는 듯하오. 귀공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시오?”
“요기라니요?”
“가령.”
무사시는 연기가 나는 곳을 가리켰던 손가락으로 단바치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대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것처럼 말이오!”
“옛?”
“보여 주마. 이것이다!”
돌연, 봄날 들판의 화창한 정적을 깨뜨리며 괴상한 비명 소리가 울리더니 단바치 몸과 무사시의 몸이 서로 튕기듯 뒤로 물러섰다. 그때, 어디에선가 ‘앗’ 하고 놀라는 자가 있었다. 그것은 무사시와 단바치가 넘어온 고개 위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다른 두 사람이었다.
“당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더니 손을 내저으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무사시의 손에는 낮게 잡은 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튕기듯 쓰러진 단바치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들에 핀 꽃을 밟으면서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다음 언덕을 향해서 조용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인의 손이 어루만지듯 봄의 미풍이 머릿결을 쓰다듬듯 불어왔다. 그러나 무사시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몸의 근육이 강철처럼 굳어졌다. 언덕에 서서 아래를 보니 완만한 들판에 있는 못이 내려다보였다. 모닥불은 그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왔다.”
그렇게 외친 것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무사시와 멀리 떨어져 우회해서 달려온 두 사내였다. 방금 무사시의 단칼에 쓰러져 죽은 단바치와 한패인 야스카와 야스베에와 오토모 반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뭐, 왔어?”
모닥불 주위에 있던 자들은 앵무새처럼 똑같이 외치며 일제히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모닥불에서 떨어져 양지쪽에 모여 있던 자들도 일제히 일어났다.
야규 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다는 말은 다소 과장된 듯이 느껴졌지만 무사시가 지금 자신의 결의를 표현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단순히 실력이나 겨루는 시합이 아니었다. 무사시는 그런 어중간한 시합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투였고 어디까지나 전쟁이었다. 자신의 총력을 걸고 운명을 결정하는 승패에 임하는 이상, 형식은 다를지라도 그의 심정은 대전大戰을 치를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삼군三軍을 움직이는 것과 자신의 모든 지식과 힘을 움직이는 것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 사람과 한 성 간의 전쟁이었다. 땅을 굳게 밟고 서 있는 무사시의 뒤꿈치에 그러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무사시의 입에서 전쟁이라는 말을 들은 네 제자는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이 그렇게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재미있군. 좋다.”
기무라가 흔쾌히 말하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아래옷을
걷어 올렸다.
“전쟁이라니 재미있군. 진중의 북과 종이 울리지는 않지만 그런 마음으로 받아 주겠다. 여보게들, 그놈을 내게로 밀어 주시게.”
기무라는 전부터 무사시를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 오던 터였다.
‘이제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지 않은가?’
네 제자는 서로 눈으로 이야기를 끝냈다는 듯 외쳤다.
“알았네. 마음대로 하게.”
두 사람이 양쪽에서 잡고 있던 무사시의 팔을 동시에 놓으며 등을 떠밀자 육 척에 가까운 무사시의 몸이 기무라 앞으로 비칠거리며 네다섯 발자국 정도 떠밀려 갔다. 기무라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슬쩍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는 떠밀려 오는 무사시의 몸과 자신의 팔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물러섰던 것이다.
“꿀꺽.”
기무라는 어금니 안쪽으로 숨을 죽이며 오른팔을 얼굴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비칠거리며 다가온 무사시의 그림자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후드득하며 칼이 울었다. 기무라의 칼이 신력神力을 발하듯 장연한 울림을 토해 냈다. 그와 동시에 ‘앗’ 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