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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78012706
· 쪽수 : 179쪽
· 출판일 : 2010-06-10
책 소개
목차
한글본 한국불교전서를 펴내며 / 4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해제 / 7
<그림> 조선표객도 / 24
일러두기 / 28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서문 / 32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 37
일본표해록 주 / 74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원문 / 81
참고 논문
해남 대둔사 승려의 일본 표착과 체험(1817~1818년) / 107
옮긴이의 말 / 174
찾아보기 / 177
책속에서
대둔사大芚寺 천불전千佛殿 조성의 배경 및 장소
현정은“일본표해록」에서 천불상을 조성하게 된 배경을 대둔사 완호翫虎대사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완호대사는 대둔사 제10대 강사講師로서 대둔사를 중건했던 인물이다. 1811년(순조 11) 2월에 대둔사에 불이 나서 세 전각만을 남기고 아홉 전각이 모두 소실되자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812년 5월에 극락전·용화당·지장전 등을 중건하였고 1817년에 천불을 조성하기 위해 화원승畵員僧이었던 현정을 초빙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기록에 서로 차이가 있다. <대둔사사적大芚寺事蹟>(:대둔사지大芚寺誌」)에는 1811년의 화재 때 소실된 건물로서 가허루·극락전·대장전·약사전·지장전·용화당·적조당·팔해당·영자각이 있다고 하여 천불전千佛殿이 등장하지 않는 반면에, <대둔사완호대사비명大芚寺玩虎大師碑銘>(:대둔사지」)과 범해 각안이 쓴 <천불조성약기>에서는 소실된 건물로서 천불전千佛殿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천불千佛을 조성한 기간도 기록에 따라 엇갈리고 있다.“일본표해록」에서는 1817년 가을에 조성을 시작하여 11월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고, <천불조성약기>에서는 1816년 8월에 조성을 시작하여 10월 20일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대둔사완호대사비명>에서는 3년이 걸려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어떤 기록이 사실에 가까운 지는 불분명하다.
:일본표해록」에서는 천불상千佛像을 조성한 곳이 경주 불석산佛石山이라고 하였다. 경주는 예로부터 옥돌로 유명하여 “경주 돌이면 다 옥돌인가?”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경주 옥돌로 만든 불상으로 대표적인 것으로 직지사 천불상이 있다.“직지사지直指寺誌」에 수록된 <천불조성기千佛造成記>에 의하면, 직지사 천불상은 효종 7년(1656) 경잠景岑 스님에 의해서 조성되었으며, 1784년(정조 8)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259위의 불상을 경주 기림사에서 조성하여 정월 24일에 점안點眼하고 육로로 운반하여 2월 4일에 직지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경북 신흥암 아미타불상·운문사 내원암 아미타불상 등 현재 전국 각지에는 경주 옥돌로 만든 불상들이 다수 있다. 그러나 불석산의 이름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대둔사완호대사비명>에서는 “기림사에서 천불상을 완성하였다.成千佛像祇林寺”라고 하였고,“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석풍계釋楓溪”항목에서는 “천불을 경주 석굴암에서 조상하였다.千佛造像作於慶州石窟庵”라고 하였으므로 불석산은 기림사와 석굴암 근처인 것으로 추정된다.
천불 조성의 최종적인 단계는 점안식이다. 이에 대해 <천불조성약기>에서는 10월 18일 경산 화원 9명이 333위를 점안하고, 19일 영남 화원 24명이 333위를 점안하고, 20일 전라도 화원 11명이 333위를 점안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일본표해록」에서는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11월 16일에 경주 장진포로 운반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10월에 천불 조성을 마치고 운송에 대한 준비를 마친 후 11월 16일에 운반을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석산에서 장진포까지 천불을 운반하고 다시 완도 상선에 실어 18일에 배를 띄웠다. 그런데 배 한 척에 천불을 싣고 운반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완도 상선이 23일에 울산 장생포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으니 5일이 걸린 셈이다. 마침 장생포에서 해남으로 가려하던 함경도 홍원 상선을 빌릴 수 있었다. 홍원 상선이 더 큰 배였기 때문에 768위를 옮겨 싣고 완도 상선에는 232위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홍원 상선에는 승려 15인과 속인 12명이 탔고 완도 상선에는 7명이 승선하였다. 두 배는 24일에 장생포를 출발하여 항해하였는데 바람이 좋지 않아 울산 군령포에 정박하여 하루를 지새운 뒤 25일에 다시 출발하였다.
그런데 동래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서북풍이 불어 닥쳤다. 완도 상선은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해변을 따라 동래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홍원 상선은 크기가 컸기 때문에 해변에 배를 붙일 수가 없었다. 배는 자꾸 육지에서 멀리 떠밀려갔고 아무리 돛을 돌리려 해도 돌릴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바람에 배를 맡기고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이틀 밤낮을 지새운 후 27일 저녁에 멀리서 가는 배를 따라 가서 한 밤중에 포구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