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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불교 > 불교 경전/법문
· ISBN : 9788978012744
· 쪽수 : 480쪽
· 출판일 : 2010-06-10
책 소개
목차
한글본 한국불교전서를 펴내며 / 5
원감국사집 해제 / 7
일러두기 / 28
원감국사어록 중간 서문 / 29
조계 원감국사어록 서문 / 32
해동 조계 제6세 원감국사가송 / 33
발문跋文 / 328
원감록圓鑑錄 인사印寫 발문跋文 / 330
원감시圓鑑詩 보유補遺 / 333
문편文篇 / 341
소편疏篇 / 351
표편表篇 / 429
부록附錄 / 441
복암화상잡저 보유 / 449
첨부 / 467
책속에서
「원감국사집」은 고려시대에 간행된 「원감국사가송園監國師歌頌」에다가 「동문선」에 수록된 시문과, 산문만 모아놓은 「복암잡저宓庵雜著」까지 더하여 번역을 한 것이다. 앞에는 시가 수록되어 있고 뒤에는 제문祭文과 표表, 소疏, 편지 등이 실려 있다.
시의 경향을 살펴보면 우선 (1) ‘담박한 선취적禪趣的 시’들을 볼 수 있다. 원감국사는 재가 시절에 유가적 경전을 다 섭렵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했듯이 출가의 결의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시문에 있어서도 불교적 이념이나 사유에 얽매임이 없이 하나의 시인으로서의 서정을 읊은 것이 많다.
卷箔引山色 주렴 올려 산 빛을 끌어들이고
連筒分澗聲 대통 이어 냇물 소리 나누어 듣네
終朝少人到 아침 내내 찾아오는 사람은 없고
杜宇自呼名 두견이 혼자서 이름을 불러대네
<한중잡영閑中雜詠>이란 시이다. 발을 걷어서 산 빛을 끌어들이고, 대통으로 시냇물 소리를 나누어 갖는다. ‘引山色’ ‘分澗聲’의 대구도 절묘하려니와, 끌다(引), 나누다(分)의 동사는 눈동자를 찍는 묘수라 하겠다. 시에는 시의 눈동자가 되는 시안詩眼이 있다 하는데 이 시안은 동사의 적절한 인용에 있다. 대립되는 사물을 어떻게 연결하느냐 할 때 거기에 절핍한 동사가 활용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한 글자에 의하여 개안開眼되는 것이다.
발과 산빛, 대통과 물소리, 그 자체는 아무 연관이 없는 개체이다. 질서 없이 흩어진 자연물이다. 이것을 끌다(引), 나누다(分)의 동사로 연결시킨다. 다시 말하면 무질서의 질서화이다. 시는 언어의 질서화이다.
전련과 결련도 묘하다. 오는 사람 없는 정적 그대로이다. ‘杜宇自呼名’이라 하니, 이렇듯 제 이름만 부르기가 사물 밖의 스스로 한가함이다.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진여眞如이다.
시의 경향으로 지적할 두 번째는 (2) ‘현실의 냉혹한 비판’이다. 국사의 현실 인식이 냉혹한 점은 여러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정신적 지도자로서 민생의 괴로움을 간과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책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尺地不墾闢 약간의 땅이라도 개간하지 않으면
民命何以資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民戶無宿糧 민가엔 비축한 식량이 없어서
太半早飢啼 태반은 아침부터 배고파 우네
況復失農業 더구나 농사일을 또 망쳤으니
當觀死無遺 하나도 빠짐없이 죽고 말겠네
嗟予亦何者 아 나는 또 무엇하는 사람인가
有漏空漣 눈물만 속절없이 흘러내리네
<농사 일을 걱정하며 계미년 사월 초하루에 빗속에서 짓다(憫農黑羊四月旦日雨中作)>라는 시이다. 4월 초하루 비 오는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모내기에 적절한 단비이다. 의당히 권농勸農이나 희농喜農이어야 한다. 그런데 농사일을 민망히 여겨야 하는 처지이다. 원은 1차의 일본 동정東征의 준비로 우리 공인工人 3만 5천 명과 대소선박 9백 척, 2차 동정에는 공인은 물론 군량미 11만 섬, 전함 9백 척을 마련하게 하였다. 흑양黑羊은 임신년으로 1272년이니 그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전함을 만들게 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런 인력동원으로 농사를 못 짓는 안타까움을 여실하게 보여 주면서, 스님의 신분으로 민생의 괴로움을 풀어주지 못하는 아픔을 이어간다.
이밖에 신랄한 사회 고발적 시가 더 있으니, 국사의 이러한 시정신은 문학사에나 사회사의 측면에서 다시 고려되어야 할 점이다. 당시 집권층의 사대부들은 민중의 삶을 외면한 채, 전 국토를 외민족의 전화 속에 두고 한 줄기의 물줄기를 경계로 하여 강화도를 ‘강도江都’라 하고 최씨崔氏의 전정專政을 찬양이나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족이 넘나드는 육지에서 끝내 버티면서, 그들의 불의에 저항하기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민중과 고락을 함께한 이들 몇몇의 고승대덕이야말로 당시 사회의 바른 지식인이요 민중의 지주였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