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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88978895644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25-07-18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글
1부 태조 · 정종 대: 창업주와 지원 세력들
배극렴(裵克廉)_초대 영의정은 어떻게 선정되었나?
명목상 개혁 세력을 대표하다| 전쟁터에서 이성계와의 만남이 개국으로 이어지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조선의 초대 영의정에 오르다| 태종은 왜 배극렴을 부정했나?
조준(趙浚)_처음부터 혁명을 꿈꾸지는 않았다
급진 개혁 세력의 지략가로 꼽히다| 뒤늦게 관직에 나아갔지만…| 동해를 말끔히 씻을 날이 있으리니!| 파격적인 인사가 이루어지다| 조준과 정도전 그리고 이방원| 태종이 조준을 신뢰한 이유는?| 기생 국화를 수장(水葬)하다
김사형(金士衡)_태조와 태종의 가교(架橋) 역할을 하다
최고의 파트너를 만나다| 고려에서 배극렴 다음으로 고위직을 지내다| 태종의 왕권 강화를 지원하다| 왜 ‘두문동 72현’의 신화가 생겨났나?| ‘두문동 72현’은 왜 조선에서 만들어졌나?| 한 번도 탄핵당하지 않고 관직 생활을 마무리하다| 장인과 사위가 묘를 함께 쓰다
정도전(鄭道傳)_정치는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다
전쟁통에도 과거를 실시하다| 4년 만에 사직하다| 맹자를 만나며 새로운 정치사상을 접하다| 성균관으로 복귀하여 열정을 불태우다| 9년 동안 유배와 낭인 생활을 하다| 다시 시작하다| 왜 지방직을 자청했을까?| 정도전과 조준, 동지인 적은 있었는지…| 조선을 조선답게| 역사에 오래 남는 국가를 위하여
심덕부(沈德符)_조선에서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다
다른 길을 선택한 형제가 모두 성공하다| 숨은 실력자였나?| 제3의 정치세력 구축을 시도하다| 한양 건설에 나서다| 집안이 조선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다
민제(閔霽)_왕권 강화에 모든 것을 내주다
집안이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받다| 이성계에 이어 이방원을 지원하다| 국가의 크고 작은 의례 정비에 기여하다| 법이 까다로우면 민심이 떠난다| 자식들로 인해 끝까지 마음고생을 하다| 왕이 조선 최초로 왕비의 폐출까지 거론하다| 혁명 동지와 왕권 강화는 별개다
이서(李舒)_집안에서 고려와 조선의 재상을 배출하다
고려와 조선에서 재상을 지내다| 이서는 왜 조선에서 주목받았나?| 최초의 왕실 이혼 사건에 연루되다
2부 태종 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과 조화
하윤(河崙)_킹메이커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다
급진 개혁 세력과 다른 길을 걷다| 한양 천도로 주목받는 듯했으나 …| 스스로 혁명 2세대를 선택하다| 태종의 즉위를 지원하고 권세를 얻다| 〈태조실록〉의 편찬을 서두르다| 왕권 강화를 지원하다| 나와 그의 사이는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다| 연안 차씨 집안과 악연을 남기다
성석린(成石璘)_지식인이자 전문 관료의 길을 걷다
집안이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 늙은 역적 신돈도 사람을 알아보다| 정치적 좌절을 딛고 성장하다| 폐가입진에 참여하여 중재에 나서다| 혁명에는 반대하다| 조선에서 다시 기회가 찾아오다|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되다| 세월을 경치 좇는 데 보내지 말라| 43년 만에 재상에 오르다|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용히 앉아 있다 세상을 떠나다
이거이(李居易)_최초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재상이 되다
베일에 가려진 인물로 평가받다| 태조에 이어 태종과 사돈이 되다| 태종의 측근 세력이 견제하다|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다| 왜 4년을 기다렸을까?| 유배지에서 사망하다
조영무(趙英茂)_최초로 무인 출신 재상이 탄생하다
군졸로 시작해서 최고 지위에 오르다| 태조의 괘씸죄에 걸리다| 최초로 무인 출신 재상이 탄생하다| 공신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다
이무(李茂)_최초로 재상이 처형당하다
정치 지향형 재상과 관료형 재상 사이에 서다| 7전 8기의 뚝심을 발휘하다| 정도전을 고발하다| 나이에 비해 빨리 출세하다| 문제는 불충한 마음이었다| 이무 사건이 확대된 이유는?| 태종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태종을 격노하게 하다| 왕실 혼인에도 변화가 일어나다
권중화(權仲和)_청빈 재상의 모범이 되다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다| 말라빠진 말 한 필과 한 되의 이를 전 재산으로 남기다| 만능 재상으로 능력을 인정받다| 83세의 고령의 나이에 재상에 오르다
남재(南在)_조선의 개국에 참여한 형제, 운명을 달리하다
태종의 정치적 배려로 위기를 넘기다| 형제가 이성계를 적극 지원한 이유는?| 세력을 결집하며 개혁에 앞장서다| 형제가 다른 길을 걷다| 참모형 관리로 평가받다| 늙은이가 과했구나!|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왕 대에 재상에 오르다
이직(李稷)_정치보다는 관리의 길을 선택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다| 진보와 보수 성향을 모두 지닌 명문가에서 성장하다| 이성계 집안과 각별한 관계를 이어가다| 공신 시대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다| 선택하기보다 선택받는 위치에 서다
3부 세종 대: 그 왕에 그 신하들
심온(沈溫)_최연소 영의정이 탄생하다
조선 초기에 3대가 재상을 지내다| 다음 세대의 대표 주자로 주목받다| 처신에 각별하게 신경썼지만 …| 44세에 영의정에 오르다| 태종의 진심은 어디까지였을까?| 박씨 집안과는 혼인하지 말라
정탁(鄭擢)_30대의 나이에 형제가 개국공신 1등에 오르다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다| 고려와 원나라에서 영향력을 지니다| 파행적인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나서다| 왕후와 장상이 어찌 혈통이 있겠습니까| 표전 문제로 형제가 운명을 달리하다| 명에서 돌아와 각종 구설수에 오르다| 죽어서도 태종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다| 가문이 경파와 향파로 분리되다
박은(朴訔)_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뿐입니다!
왕의 의도를 잘 읽는 것도 능력이다| 이숙번과 하윤에게도 맞서다| 측근 공신들의 공백을 메우다| 신은 일이 이 지경에 이른지 몰랐습니다| 태종은 왜 박은을 주목했나?| 마지막까지 태종의 신하로 남다| 집안이 많은 일화를 남기다
유정현(柳廷顯)_비공신 재상 시대를 열다
의외의 인사가 이루어지다| 태종의 최측근도 비판하다| 내 사전에 예외는 없다!| 법 집행에도 예외를 두지 않다| 공신의 시대가 막을 내리다
유관(柳寬)_나이는 잊어라!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별하다| 백성을 위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 참으로 겁 없는 신하다!| 최고령으로 재상에 오르다| 나이는 잊어라!
황희(黃喜)_처음부터 준비된 재상은 아니었다
정사보다 야사에 더 많이 등장하다| 고려와 각별한 인연을 남기다| 태조의 눈 밖에 나다| 태종과의 만남으로 서서히 변화하다| 왕의 지근거리에서 국정을 경험하다| 태종의 철저한 검증 절차를 통과하다| 다시 좌천당하다| 우여곡절 끝에 세종을 만나다| 모든 지혜와 처신은 민생(民生)으로 귀결되다| 나라의 재목은 평소에 잘 다듬어야 한다| 최장수 재상을 지내다| 열 번이나 사직을 청했지만 거절당하다
맹사성(孟思誠)_관직 생활의 절반을 좌천·파직·유배로 보내다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 최대 위기를 맞이하다| 세종 시대에 가장 적합한 관리로 성장하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고초를 겪다| 기다림의 미학과 느림의 철학을 실천에 옮기다|
참고 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자 이성계는 물에 만 밥을 먹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 모습에 당황한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기만 했고,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이때 배극렴이 앞장서서 문을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가 이성계 앞에 국새를 내놓고 거두어줄 것을 청하며 이성계와 담판을 벌였다. 배극렴은 이 자리에서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당위성을 주장하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성계는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라며 수차례 거절했지만, 배극렴 등도 물러서지 않자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이성계의 나이 58세였다.
정도전은 나라의 근본을 세우면서 통치 체제는 중앙집권제를, 통치 철학으로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를 기초로 하여 각종 제도의 정비에 필요한 백과전서식 교재 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태조 3년(1394)에는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태조에게 바쳤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에 기초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포괄적인 정치체제 연구서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법전으로, 중국의 사례와 고려의 경험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립하여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제도와 운영 원리를 제시하여 정치를 중심으로 모든 사유(事由)를 구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석린은 판한성부사에서 물러난 후에도 한성의 운영과 정비에 관한 주요 현안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태종 1년(1401) 1월, 좌의정이었던 그는 개성에 머물던 태종에게 신년 하례를 위해 갔다가 태종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신도(新都, 한성)의 길이 넓으니 길 양쪽에 백성들이 시루(市樓, 상설 시장)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남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태종의 허가를 받기도 했다.
한성과 관련한 성석린의 건의는 대부분 한성의 기반 시설 조성에 관한 것이었고, 특히 시장의 조성은 동아시아 국가의 수도 건설에서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태종이 한성으로 재천도할 때도 논의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등 조선 초기의 한성 건설과 운영 그리고 정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