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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88979195620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20-09-19
책 소개
목차
왕위를 버린 남자 - 양녕대군
기도 - 소헌왕후
나만 몰랐던 사랑 이야기 - 문종
붉은 적삼 - 연산군
다홍치마 - 단경왕후
장옥정전 - 궁녀 김원미
첫사랑 - 봉이
소설 속 인물들
참고자료
소설을 마치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승리했다 하옵니다.”
“참말이냐”
“예. 회안군 방간과 박포를 모두 생포하셨다 하옵니다.”
어머니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어머니만 바라보던 우리 남매에게 달려왔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은 울면서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무슨 일이 벌어진 줄 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저 어머니의 그 말에 안정이 되었는지 그제야 지쳐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2년 전,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던 그때처럼 아버지는 피범벅이 된 채 돌아왔다. 차마 묻지 못했다. 숙부인 회안군 방간은 어떻게 되었는지. 회안군 방간의 큰아들인 의령군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언제나 나를 무시하지 않고 귀여워해주었다. 의령군도 난에 참여한 걸까? 설마 다른 사촌 형제들도 죽이시는 걸까? 나는 두려워 묻지 못했다. 그저 궁금했다. 왕위란 것이 무엇이기에 친혈육과도 전쟁을 벌여야 하는지.
“쉿!”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싶었다. 아버지의 한숨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충녕대군(세종)이 첫째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른다면 만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릴 텐데.”
“첫째와 셋째가 바뀌어 태어났으면 하는 아쉬움을 말할 데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오늘 그렇게 혼이 났으니 이제 세자도 정신을 차리고 학문에 정진할 것입니다. 그러니 믿고 봐주소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에 침전 앞에 있던 궁녀가 바들바들 떨었다. 난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 <왕위를 버린 남자 - 양녕대군> 중에서
폐출을 면했다고는 하나 기쁘지 않았습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었습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제가 왕비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제어하지 못한 전하께 서운했습니다. 아니, 미웠습니다. 아버지는 권세를 탐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제일 잘 알고 계신 전하께서 어찌 모른 척 제 아버지가 사사되는 것을 두고 본단 말입니까?
그때부터였습니다. 체한 듯 가슴 한쪽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가슴을 쳐도 체기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태종대왕께서도, 전하께서도 밥을 들라 명하셨습니다. 임영대군 구를 임신한 몸이었습니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억지로 밥 한 술을 삼키면 삼키자마자 신물과 함께 도로 넘어왔습니다. 억지로 먹고 토하길 반복하다 보니 목구멍과 입이 위산으로 헐어버렸습니다. 차라리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드러누웠습니다.
생떼 같은 자식을 품에서 떼어놓는 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왕비여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선대의 후궁들과 전하의 후궁들까지 복잡한 내명부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습니다. 내 새끼를 기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어미든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이지요. 아무리 미워도 제 자식을 길러주는 후궁에게는 깍듯하게 예의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을 볼모로 잡힌 채 저는 왕비로 살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을 볼 때마다 어미가 아닌 왕비여야만 했던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모자라고 보잘것없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을요. - <기도 -소헌왕후> 중에서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순임은 손수 만든 요깃거리를 챙겨 가지고 와서 내 옆에 살그머니 놓아두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내가 입을 저고리에 자수를 놓았다. 구석은 어두우니 내 곁으로 다가오라 이르면 새빨개진 얼굴로 조그맣게 말했다.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혹시나 소인이 가까이 다가가 저하께서 공부하시는 데 방해가 될까 저어되옵니다.”
거절하는 모습조차 어여뻤다.
다른 궁녀들은 승은을 입으면 첩지를 내려달라 조르기 마련인데 순임은 내가 은근슬쩍 얘기를 꺼내도 오히려 고개를 내저었다.
“미천한 소인은 그저 저하를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나는 세상 누구보다 나쁜 남자였다. 순임은 그런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세자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순임은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돈이 많아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순임은 다른 후궁들처럼 사치스러운 뒤꽂이나 화려한 장신구보다는 꽃 한 송이 꺾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회임으로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 달이나 찾아보지 않다 처소에 들른 날이었다. 원망스런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좋아서 나를 힐끔거리는 모양이 한심스럽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자존감 따윈 없는 아이라 비웃으며 물었다.
“넌 내가 한 달 만에 왔는데도 원망하는 기색 하나 없구나. 내가 그리도 좋으냐? 도대체 왜 내가 좋은 게냐”
“모르겠습니다.”
순간 심통이 났다. - <나만 몰랐던 사랑 이야기 - 문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