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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한국전쟁 이후~현재
· ISBN : 9788979661347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18-03-26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한국 현대사 연표
1장 해방 ─ 새로운 사회는 가능했는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라
신탁통치 ─ 미국이나 소련의 감독은 필요 없다
해방 공간에서 좌파의 전략
중간파와 김구의 길이 대안이었을까
북한 ‘인민민주주의 개혁’의 본질
해방 정국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
2장 한국전쟁 ─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한국전쟁 ─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남의 땅에서 힘을 겨룬 두 강대국
한국전쟁, 누구의 전쟁인가
3장 4·19에서 10·26까지 ─ 노동계급이 전진을 준비하다
4·19 혁명 ─ 냉전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은 가능하다
5·16 쿠데타 ─ 억압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시작
박정희 개발독재와 남한 자본주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 ─ “배고파서 못 살겠다. 매판자본 잡아먹자”
베트남 민중의 피로 경제성장의 시동 걸기
4장 5·18에서 1987년까지 ─ 노동계급의 역사적 전진
광주 민중 항쟁 ─ 한국 노동계급 운동의 변곡점
1987년 6월 항쟁 ─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 노동계급의 결정적 힘을 보여 주다
후주
리뷰
책속에서
광주 민중 항쟁과 역사적 의의
전두환은 12월 12일 정승화를 박정희 살해 공모 혐의로 체포하면서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뒤 전두환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파괴하기 위해 움직였다. … 그리고 주요 방송과 신문사를 회유·통제하는 ‘K공작’을 펼친다. 새로운 ‘King’ 전두환을 국가 지도자로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대응은 초라했다. 김영삼은 … 신군부와 흥정을 잘 하면 자기가 대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김대중은 재야·학생 운동을 자제시키기 급급했다. 군부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 5월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학교를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는 쇠심이 박힌 살상용 특수 곤봉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 학생들을 쫓아가 머리를 강타하고 실신하면 질질 끌고 갔다. … 22일 광주는 해방구가 됐다. 시민군은 자체 조직을 정비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모든 차량을 등록하고 구호·연락·수송·보급·순찰·전투 등의 임무를 나눠 조직했다. 사재기나 매점매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은행이나 신용금고에서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 25일 투쟁적인 항쟁 지도부가 구성됐고, 26일 마지막인 5차 궐기대회가 도청 앞에서 열려 최후 투쟁을 다짐했다. 계엄군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쟁 지도부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계엄군과 싸워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사람들만이 남았다. … 광주는 물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와 해방을 원했던 사람들의 열망이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전두환에 대한 ‘역사의 복수’라 할 만하다.
1987년, 민주주의를 쟁취한 주역은 누구인가
6월 10일 마주보고 달리는 두 개의 열차가 충돌했다. … 전두환 정권은 대중의 열망과는 정반대로 군부독재를 지속하고자 했다. … 거리에서는 1960년 4·19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거리 곳곳에서 경찰은 무장해제되거나 시위대에게 곤욕을 치렀다. … 22개 지역에서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어떤 지역은 경찰이 아예 진압을 포기하기도 했다. … 그러나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6월 항쟁 기간 내내 동요하며 …· 투쟁을 전진시키기보다 정치 협상을 통해 ‘파국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김대중 부인 이희호는 … 자서전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일 말고 우리[김대중을 포함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고 회고했다.] 김대중 측은 김영삼과 함께 국본 내에서 신중론을 펴며 대규모 집회 계획 연기를 주장했다. … 야당이 동요할 때 실제 투쟁을 전진시킨 것은 거리의 대중이었다. 국본이 주최한 세 번의 대규모 집회 외에도 국본이 주도하지 않은 거리 시위가 매일 벌어졌다. … [6월 항쟁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본 노동자들은 자신의 작업장에서는 삶이 그대로인 현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억압적 노동 통제하에서 억눌려 온 노동자들의 요구는 짧은 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 1987년 6월 항쟁을 뒤이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계급의 결정적 힘을 보여 주며 군부독재의 반동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
박정희 개발독재의 그늘
박정희 시대는 국가의 ‘지도’ 아래 급속한 산업화가 이뤄져 남한 자본주의가 자율적인 자본축적의 중심을 확립한 시기였다. … 남한의 경제성장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단기간에 이뤄졌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선진 자본주의의 기술을 단기간에 학습함으로써 후발 공업국의 이익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값싼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 베트남전쟁은 남한 재벌에게는 축복이었다. … “한국은 베트남 참전국으로서 파병군인의 송금, 미군의 물자 조달 등을 중심으로 연간 2억 달러, 1965~1972년 누계 10억 2200만 달러에 달하는 특수를 얻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 4687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크게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4만 1000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어느 조사를 보면 900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 노동자들의 희생과 이를 강요하는 국가의 강력한 개입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