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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79735918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22-12-02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1부 그대 있었습니다
최고다 당신
살아생전 부의금
나는 사기꾼이로소이다
에덴, 스무살의 청춘
이상한 돈독선생
놀이터의 특별반
유쾌한 몽둥이
두루두루 그때그때
속편하게 사는 법
2부 그대 덕분입니다
자고로 욕이란
같은 일 다른 기억
동래, 동래아줌마
자신에게 다정하기
우즈베키스탄 그녀
다만 있을 뿐
백두산 호랑이 간밖에 없소
너를 만나 다행이야
바보들의 셈을 위하여
3부 그대가 그립습니다
그래, 그래라
강하늘, 강 하늘
배추겉잎의 철학
땅님과 꽃님 닭님 하늘님
독박육아 으뜸육아
다시 만난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멈춰라 제발
별들의 위문 공연
4부 그대가 보입니다
마 가입시더
까치부부와 매미
의자 앞의 생
꽃 양동이 이고서
탁주와 와인
어느 날의 일기
나무코트 한 벌 입고
R21-1040
예, 하겠습니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참을성이 적은가봐. 욱할 때는 참을 수가 없네, 버럭 화부터 내고. 제 밥그릇 엎은 강아지마냥 풀이 죽은 내게 엄마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래도 되야. 니는 순-해 보여서 그런 구석도 있어야 남들이 조심하제이. 벌에 있는 침이라고 생각해. 가만있던 벌도 건들면 목숨 내놓고 찌르자너? 그래서 꿀도 지키고.
엄마 말마따나 자랄 때 그리 생겼다 소리를 어쩌다 듣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어젯밤에 골목 끝집 말남이네 초인종을 누르고 냅다 도망친 아이도 나였고 답안지 몰래 베껴낸 숙제도 많다. 없는 숙제 핑계로 순이네서 밤새 놀았던 적도 부지기수다 초등생이 말이다. 엄마 돈으로 달짝지근한 잼도 몰래 사먹고 동무에게 선심도 썼다. 그랬는데 순하다니 모르고 하는 소리다.
어쨌거나 나는 안심이 됐다. 엄마 말 한마디에 성질 더러운 사람에서 착한 사람이 된 것이다. 자신을 위장하는 방어무기 하나쯤은 당연한 일이라니. 아 엄마 최고다! 덕분에 가벼워진 마음은 파르릉 하늘을 날았다. 몹쓸 단점이 내 생각만큼 나쁜 일은 아닌 듯해서 살아가며 천천히 고치기로 했다.
그런 엄마와 살았으면서도 때때로 마음에 칼금을 긋는다. ‘괜~찮아야’ 한마디면 될 것을. 지레 걱정으로 자잘한 소리들을 뱉으니 상담가란 이름이 무색하다. 전쟁 통에 자라서 한글도 겨우 쓰는 엄마가 명색이 상담 수련감독인 나보다 백배는 낫다. 이런 내 걱정을 만사형통 엄마는 뭐라 하실까. 무심한 듯 툭 한마디 던질 것 같다. 중도 제 머리는 못 깎는다고 하잖어? 크 어쩌면 어리석은 나를 핑계 대고픈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극한 직업이란 우스개가 있다. 비대면 시대, 온라인 개학에 아이들은 엄마부터 찾는다. 엄마라고 컴퓨터에 능숙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아프면 의사 노릇도 한다. 요리도 하고 부동산 상식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사춘기 자녀의 불뚝거림도 해결하는 상담가도 된다. 엄마는 못 하는 일이 없는 만능 해결사다.
브라질의 로베르타 마세나. 그녀는 미화원 유니폼을 입고 대학 졸업사진을 찍었다. 궂은 일 하며 뒷바라지 한 엄마에게 고마움을 전하려 한다. 가운 안에 엄마의 작업복을 입고, 사진 촬영 때 가운을 활짝 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작업복이란 걸 알고 눈물 속에 딸을 껴안았다. 사연을 들은 한 대학이 대학원 진학을 돕자 모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교육전문가가 되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꿈’인 마세나는 좋은 선생이 될 것이다. 청소부 엄마를 울린 그의 졸업복이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까.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신 분, 내가 얼마나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마세나.
그이는 알았는데 나는 몰랐다. 몰라도 한참 몰라서 떠난 뒤에야 엎드려 후회했다. 드러내기도 염치없어 속으로 삭혔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젊은 날은 오롯이 우리의 거름이었다.
난생 처음 거리에서 장사를 한 엄마다. 노상에서 전을 부치거나 야채 파는 일이 녹록할 리 없지만 언제나 무던(적어도 딸 셋의 눈에는)했다. 못다 핀 엄마의 삶, 철없던 나의 안중에는 없었다.
엄마 살을 파먹은 애기 고동이, 빈 껍질로 떠내려가는 에미에게 우리 엄마 시집가네 했단다. 어쩌면 엄마는 떠나가는 고동 얘기로 당신 삶을 들려주고 싶었을까. 삶이란 그런 것이니 떠나보내고 그냥 살라는 말인가. 나는 엄마가 그리 쉽게 우릴 두고 갈 줄 몰랐다. 늘 든든하고 따뜻한 내 자리인 줄 알았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안개 되어 내린다. 젖는다.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이.
의심보다 일단 다가서고 보는 내게 건네는 엄마의 말. 니는 하늘이 돌본다. 나의 사는 모양새가 하도 답답해서 하늘도 걱정되어 챙긴단다. 인간관계가 공치기라면, 공을 치는 사람은 부딪쳐 튕길 방향을 예측하고 공을 친다. 한데 나라는 공은 단순해서 공을 친 방향 그대로 직진해서 멈춘단다. 예상 각도대로 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추면 게임이 되겠는가. 오히려 상대가 미칠 지경이지. 그래서 득실대는 세파에 이만큼이라도 버텨냈단다.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하늘이 내편이라니. 걱정되는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긍정방식, 들을수록 그럴싸하다. 엄마도 나도 세상살이 염려 없다. 하늘이 있는데 뭘.
문득 영화 <계춘 할망>이 떠오른다. ‘세상살이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온전한 내 편 하나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여. 내가 네 편 해줄 테니 너는 네 원대로 살라’ 손녀에게 전하는 할머니의 그 말에 나는 둑 터지듯 울었다. 어디선가 들은 듯 익숙한 말, 그리운 엄마 목소리였다.
엄마 최고야! 그 한 마디를 못했다. 그때 들려드릴 것을. 엄마는 당신이 피운 꽃을 모른다. 흔적으로 남긴 위로가 얼마나 힘이 됐는지도.
한 수 배운 긍정으로 파도 타듯 생을 넘는다. 살다보면 되리라. 누군가의 최고가 되는 삶. 엄마처럼.
― [최고다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