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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도서관

구름 속의 도서관

김형술 (지은이)
시와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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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속의 도서관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구름 속의 도서관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83451224
· 쪽수 : 503쪽
· 출판일 : 2021-10-01

책 소개

반시 기획산문집 1권. 저자가 문학 에세이를 들춰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시인으로서의 완벽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겠고, 이제 와서 이를 드러내게 된 것은 문인으로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 대한 불가항력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1 바다
책을 내면서
여덟 살의 나이를 가진 바다
쑥떡쑥떡 미니스커트
산벚나무를 위하여
하수구의 詩
구름의 시간, 구름의 거리
시인들은 무슨 재미로 사나
베네수엘라
그해 봄날의 꽃놀이
말들
나는 비행기다
분홍빛 경계
거울을 닦는 사람

2 의자
구름 위의 의자
의자 위의 구름
저녁의 의자
의자 속의 낙타
가출하는 의자
신경쇠약 직전의 의자
괴짜들, 짱구들, 젊은 의자들
의자와의 인터뷰
의자와의 지난한 싸움

3 괴물
거울은 힘이 세다
窓 혹은 門으로서의 영화
나쁜 남자, 아버지 혹은 그저 한 사람
거울에 비친 물 혹은 기차
거울 속의 괴물들
영화에서 배우다
누가 영화를 두려워하랴
구름 속의 도서관

4 詩
말의 몸, 말과 몸
시간의 얼굴
시선들, 관점들, 닫힌 바깥과 열린 안
생각할까, 노래 먼저 할까
상처를 인식하는 여러 시각들
시선들, 마주보거나 혹은
지명들
집 혹은 무기로서의 언어
그네와 새
잠들지 않는 밤의 시인 - 정영태 시인의 시들
일렉트로니카, 재즈, 혹은 - 조말선의 시 몇 편
진부한 세계에 관한 차가운 응시
- 박한나의 시에 관한 즐거운 오독
일상의 환멸을 견디는 청정한 물의 시편들
- 이선형 시집 『밤과 고양이와 벚나무』
장대 끝에 매달린 도도한 눈 - 성선경 시인의 시세계
원심력 혹은 둥근 거미줄 - 김영근 시집 『행복한 감옥』
구름 속의 도서관

5 시인
극極과 독毒의 내공 혹은 환멸의 끝 ? 김언희 시인 인터뷰
봄을 기다리며 출렁이는 바다처럼 - 허만하 시인 인터뷰
둥근 생명의 줄 - 강은교시인 인터뷰
詩에 매달아 놓고 못박고 싶어요 - 여정 시인 인터뷰
강렬한 육식성의 육성과 이미지 - 박미영 시인 인터뷰
둥글고 깊은 어둠 속의 눈 - 윤희수 시인 인터뷰

해설: 시인이 지나간다, 시인이! - 박대현│문학평론가

저자소개

책속에서

여덟 살의 나이를 가진 바다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아니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당시의 마음떨림이 생생하게 가슴 한편에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당시의 ‘경남 창원군 웅동면 소사리’ 그리고 행정지역명이 의창군이었던 시절을 거쳐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인 그곳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골마을이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이래야 고작 소를 먹이러 가는 마을의 뒷산이거나 초가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마을 한 귀퉁이의 공터이거나 기껏 멀리 나가본다고 해야 5일장이 열리는 국도변 면사무소 근처가 고작인 곳. 그래서 나는 세상이 단 지 그런 곳으로만 이루어진 곳인 줄로만 알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동네에서 같이 놀던 아이들과 같이 웅동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고 거기서 처음으로 다른 마을의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이들과 처음으로 놀러간 다른 마을의 이름이 영길부락(남양어촌계가 있는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남양동), 초등학교 교문을 나와 5일장이 열리는 면사무소 곁 공터를 지나 붉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버스가 달려가는 신작로를 가로질러 길 아래로 내려서니 놀랍게도 그 곳에 바다가 위치하고 있었다. 아니 그 곳이 바다, 라고 불린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그때 나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주 띄엄띄엄 부산가는 시외버스가 달려가곤 하는 신작로 근처는 위험하니 가면 안된다고 하신 부모님의 당부를 어길 수 없어서 아주 먼발치에서 그저 두려움과 경외감에 찬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신작로. 그 길 바로 아래쪽에 바다라고 부르는 이런 신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니. 알고 보니 버스가 다니는 그 신작로가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이루는 둑이었으며 그 둑으로 인해 바닷물이 내가 살고 있는 마을까지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방패막(방파제)이었다는 걸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바다와 맞닥뜨린 그날은 아마도 밀물 때였음이 분명하다.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단 초등학교 입학생들 몇몇이 걸어가고 있는 바다 사이로 난 길 양쪽에서 거센 물살들이 출렁이며 마치 길을 삼킬 듯 밀려오고 있었는데 그 압도적인 광경이 주는 두려움에 질려버린 나는 그 둑길 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내가 목격한 두려움이었으며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 아이를 한없이 주눅 들게 하는 공포의 대상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겁에 질려 멈칫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던 영길마을 아이들은 나의 처지를 금세 알아차렸다는 듯 거리낌 없이 둑 밑으로 내려가 거친 물살이 밀려오는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물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려 보여주며 웃어대곤 했다. 바다의 그 끝 보이지 않는 넓음과 검푸른 물살을 일으키며 육지로 달려오는 파도의 위용에 위압감을 느낀 내게 바닷가 마을에 사는 아이들의 활달한 웃음소리마저 경이롭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나를 덮쳐 저 바다 속으로 끌어들일 것 같은 바다의 거대한 힘은 논과 밭,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여덟 살짜리 아이의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크고 위대해 보였던 것이다. 바다 사이로 난 그 둑길을 따라 영길마을에 가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처음 본 바다의 위용에 압도당한 나는 며칠 동안 가위에 눌렸던 듯했고 가슴에 남아있는 바다의 강렬함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결국 그 바다를 혼자서 찾아가 본 기억만을 갖고 있다. 며칠 동안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는 열망과 바다가 주는 두려움만 확인하게 될 거라는 망설임 사이를 수없이 오가다가 마침내 집을 나섰다. 어둑하게 해가 지고 어머니들이 놀던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불러들이는 어스름 무렵에 집을 나와 걷고 걸어서 마침내 바다가 보이는 그 신작로길 위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거친 파도가 넘실대며 육지를 위협하리라던 나의 기대를 끼끗하게 거두어 간 바다가 거기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썰물의 긴 개펄 위에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거대한 적막이 평화롭게 누워있었고 작은 바닷게들이 들락거리는 바다의 섬세한 숨구멍마다 봄의 초저녁 달빛이 내려앉아 마치 개펄에 보석을 깔아놓은 듯 반짝였다. 지금은 마천주물공단이 들어서서 흔적도 없는 그 바다가 있던 자리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나의 첫 바다를 만난다. 여덟 살의 나이를 가진 채 늙지 않는 그 바다는 여전히 내 안에서 변함없이 출렁이거나 고요하게 반짝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럴 때 마다 내 가슴은 바다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김없이 다시 뛰곤 한다.


쑥덕쑥덕 미니스커트

중학교 1학년이 시작되던 봄. 부산에서 새로운 선생이 부임해왔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교생실습을 마친 햇병아리 여선생님. 학기 첫날 운동장에서 열린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단상에 올라선 여선생님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미니스커트. 그것도 무릎에서 한참 올라가 허벅지가 훤한 짧은 치마. 당시의 시골에선 처음 보는 차림이라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서 어디다 눈을 둘지 몰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당하기 그지없는 처녀선생님. 일말의 수줍음도 없이 쇳소리 섞인 당찬 목소리로 국어선생이라 소개를 하고 내려갔는데 놀래라. 우리 반 담임이시란다. 수업 첫 날에 교실에 들어오자 말자 각자 지 맘대로 글을 써내라고 작문을 시켰다. 그러고는 등을 돌리고 서서 한 시간 내내 창 너머 바다만 바라보는 것이다. 괴발개발 써낸 작문으로 나와 또 한 여학생이 교무실로 불려갔다. 다짜고짜로 책 한 권씩을 내밀며 토요일까지 독후감을 써오라신다. 내가 받은 책은 이광수의 소설 『무정』. 그날 이후로 1주일에 무조건 책 한권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는 일을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했다.

선생님은 누가 봐도 예쁘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과 뭉툭한 코와 유난히 초롱초롱하지만 약간 날카로운 눈. 그렇다고 다리가 날씬한 것도 아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사시사철 미니스커트만 고집했다. 별로 안 이쁜 얼굴과 별로 멋지지 않은 다리로 일 년 내내 미니스커트만 입으며 온 시골마을의 쑥덕쑥덕으로 버무려진 흘깃흘깃한 눈총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던 선생님. 하지만 이 20대 여선생님의 하이힐 신은 걸음걸이는 늘 씩씩하고 당당했다. 그런 연유로 선생님과 선생님의 미니스커트는 조용하던 시골마을의 뜨거운 감자였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여학생은 여학생들끼리, 남학생은 남학생들끼리, 총각들은 총각끼리, 처녀들은 처녀들끼리 모두가 시퍼런 쑥떡들을 만들어내느라 온 동네가 쑥덕이었다. 여기서도 쑥떡쑥떡, 저기서도 쑥떡쑥떡. 겨울 지나고 보릿고개에나 먹던 쑥떡, 누구 집 잔칫날이나 회갑 날에야 먹던 쑥떡들이 온 동네 집집마다 만들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어느 날은 교장선생님에게 불려가서 미니스커트를 입지 말 것을 종용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 소식은 또 어른들 말을 무시하는 발칙한 선생 혹은 미풍양식을 해치는 부도덕한 여선생으로 몰아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의 용감한 여선생님의 미니스커트는 변함이 없었다.

사람들이 만드는 쑥떡의 숫자들과는 상관없이 착하고 순진했던 시골중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이 여선생님을 잘 따랐다. 더러 시골학교 어디에나 있었던 일부 학생들, 이른 바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으슥한 곳들만 날아다니던 비행청소년들이 화장실 뒷담벼락에 흰 분필로 써놓았던 낙서 몇 줄이 고작이었을 뿐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니스커트와는 상관없이 성생님은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 심지어는 방과 후까지, 학교에서나 학교바깥에서나 엄격했다. 수업시간에는 한눈을 팔 수가 없었고 방과 후에는 5일장 장터 부근을 어슬렁거릴 수도 없었으며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진해 시내 변두리 극장에서 2본 동시 상영 무협영화를 보러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시골학생들의 거짓말을 어찌나 잘 알아채시던 지 말하자면 우리는 미니스커트 여선생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이다. 원래가 선생님에 관한 판단은 학생들이 더 잘하는 법. 수업시간에서 느끼는 수업의 질과 학교 안팎에서 보는 선생님의 태도에서 우리는 모두 선생님을 따르고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하나, 잊어버리지도 않고 정기적으로 작문을 시키는 일 하나만 빼면. 물론 작문을 하러간다는 핑계로 바닷가도 가고 산에도 오르고 들판으로도 가고...하는 야외수업은 정말 좋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다시 새로운 선생님이 부임해왔다. 이번에는 미술선생님. 아무리 봐도 미술 선생 같이는 안보이고 소도둑놈같이 생긴 느글느글한 남자선생이 등장했다. 약간 시니컬한 말투에 후줄근한 옷자림의 이 남자선생은 오자마자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야. 김미수기. 어이 황영자야. 이렇게 부르는 다른 선생들과는 달리 김미수~~~욱. 황영자아아~~~...하고 여학생들의 이름을 다정하고 느끼하게 불러대는 탓인 듯 했다. 하지만 미술시간에 물감이며 스케치북 따위를 잘 준비해오지 않는 남학생들에게는 대단히 엄격하였으므로, 가령 귀를 잡아당긴다거나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거나 운동장을 뛰게 하는 벌 따위를 주었으므로 금세 남학생들에게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저렇게 느끼하고 좀 시건방지고 별로 잘생기지도 않은 소도둑선생이 여학생들은 뭐가 그리 좋은 지 교무실에 꽃을 꽂아 놓는다든지, 부모님이 뼈 빠지게 농사지은 감자, 고구마, 산딸기를 가져다준다든지 하면서 어찌하면 미술선생에게 이름 한 번 더 불리고 심부름 한 번 더 할까, 그 생각으로 부쩍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던 여학생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남학생들은 모두 끼리끼리 운동장 구석이나 냄새나는 화장실 뒤에 삼삼오오 모여서 소도둑선생을 반죽으로 쑥떡을 만들곤 했다.

밉다 밉다하면 더 미운 짓 한다더니 소도둑선생을 쑥떡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모두의 미니스커트 선생님과 소도둑 선생이 사귄다는 소문이 난 것. 별들이 폭죽처럼 쏟아지던 어느 날 저녁 바닷가에서, 방죽 위 흐드러진 아카시아 꽃그늘 아래에서 소도둑과 미니스커트가 다정하게 속삭이는 걸 봤다는 얼굴 없는 목격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그러자 소문은 순식간에 새끼를 치기 시작했는데, 한 번에 열두 마리씩 새끼를 낳는 흑돼지보다 더 많은 새끼를 치기 시작했는데, 손잡는 걸 봤다, 에서 뽀뽀하는 걸 봤다, 를 거쳐 원래 둘이 대학생 때부터 애인이라 카더라, 곧 결혼한다 카더라...까지 초스피드로 두 사람을 엮어버렸다. 우리 멋쟁이 미술선생님이 못생긴데다 미니스커트만 줄 창 입어대는 국어선생님과 그럴 리가 없어,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절대 없어, 라고 믿고 싶은 여학생들과 우리 국어선생님이 눈이 얼마나 높은데 저런 소도둑선생과 사귄다꼬, 그기 말이 되나, 절대 안되지, 라고 믿고 싶은 남학생들에게 두 선생님은 만들기 쉬운 쑥떡이었다. 여학생들은 여선생님을 향해 미술선생님이 아까워, 라고 맹렬하게 쑥떡을 날렸고 남학생들은 화장실 뒤편이나 전봇대에 소도둑선생을 욕하는 낙서로 쑥떡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시골중학교 학생들의 하루는 늘 바빴다. 학교에 오기 전에 새벽이슬을 헤치고 나가 소꼴을 한 짐 베어놓고 와야 하는 것은 들판과 산 쪽에 사는 학생들, 아버지를 도와 배를 타고 나가 통발이며 주낙 같은 그물을 털어 새벽고기를 잡고 나서야 등교할 수 있는 건 바닷가에 사는 학생들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나서도 마찬가지, 소의 풀을 먹이러 가야하고 농사일도 도와야하고 그물도 치러 가야하고 물고기 배도 따야하는 게 너나 없는 시골학생들의 하루하루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백일장이며 사생대회를 번질나게 드나 든 나의 경력은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미니스커트 선생님은 백일장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을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 그랬으면서 시골학생들에게 작문은 쉼 없이 시키셨다. 하지만 소도둑 선생의 미술수업은 대단히 엄격했다. 방과 후에 남아서 그려야하는 그놈의 지겨운 줄리안, 아그리파 따위의 석고데생 연습은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걸 완벽하게 못하면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소도둑 선생의 고집은 대충 봐주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밥도 겨우 먹고 사는 시골촌놈이 그림은 그려서 머할끼고, 화가 될끼가, 화가되면 밥 빌어먹는다, 고 하시던 부모님 때문이었는지 그림수업에 별 흥미도 집중도 못했었다. 그런데다 고집불통 소도둑 선생이 감히 국어선생님과 사귄다고 하니까 더 하기가 싫어졌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미니스커트 선생님은 소도둑선생과 사귈 리가 없어, 라는 가당찮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읽을거리가 귀했던 시골에서 미니스커트 선생님이 과제로 내주었던 책읽기와 독후감쓰기는 대단한 놀이이자 공부였다. 1주일에 책 한권을 읽기 위해 나는 산 속에 소를 풀어놓고 나무그늘에 앉아 책을 읽는 눈꼴 시럽고 재수없는 촌놈이 되었고 책에 빠져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 바람에 소를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소가 없었다. 방과후 남의 집 소 풀 뜯기기는 지금으로 치면 아르바이트였다) 그때 읽은 명작소설들의 내용은 서로 엉키고 뒤섞여서 헷갈리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읽은 시간과 장소 몇 개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추운 겨울날 햇빛이 잘 드는 논둑 아래 앉아 있던 들판을 쌩쌩 달려가는 바람소리 곁에서 읽은 「햄릿」, 조잘거리며 흘러가는 봄의 개울물 소리가 책 속의 문장들을 적시던 「무정」, 아른거리는 미루나무 그림자와 매미소리가 책장을 넘기던 「개선문」.... 그런 책들 속의 그 낯설고 먼 곳, 사람들이 들판과 바다와 마을이 세상의 전부이던 촌놈을 감히 산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게다가 남들의 이목이나 체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골공동체의 삶에서 남들이 뭐라고 하던 그리 크게 개의치 않는 고집 센 촌놈이 되어갔던 것도 미니스커트 선생님과 무작정 읽어댔던 그 책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머스마 자슥이 생각하는 게 이것 밖에 안돼?” 미니스커트 선생님의 담담하지만 날카롭던 이 목소리는 시를 한 편 쓸 때마다 여전히 내 귓가에 살아있다. 여름의 꽃과 가을의 나무, 밤의 전신주와 겨울바람까지도 서로 쑥덕거리며 달려오고 달려가던 그 아득한 시간들 까지도 여전히 생생하게.


산벚나무를 위하여
국도변에서 멀리 떨어진 숲 한가운데 산벚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사람의 손길에 가꾸어져 길 양쪽에 늘어선 채 엷은 분홍빛 꽃잎들을 흩날리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벚나무가 아니라, 먼 숲에 홀로 서 있어 봄 한철 꽃을 피우지 않는다면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를, 그저 숲의 일부일 뿐인 나무 한 그루. 하지만 나는 왠지 멀리 있는 그 산벚나무 한 그루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이만큼 비껴 서서 온몸으로 꽃을 피우고 선 산벚나무는 산중턱에 걸린 부드러운 구름송이 같기도 하고 해질녘의 어스름이나 흐린 날이면 차고 서늘한 광채를 온몸에 감고 서 있기도 해서 지상으로 내려와 앉은 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 산벚나무는 어쩌다 인간의 마을에 사는 벚꽃나무 군락을 벗어나 산중에 홀로 꽃을 피우게 된 것일까. 꽃을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의 행렬도, 그들이 바치는 찬사와 감탄도 없는 곳에서 저리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일까. 하릴없는 마음이 그리움이 되어 숲 속의 산벚나무 근처로 달려간다. 부드러운 봄의 대기에 둘러싸여 있는 꽃그늘에 서 있노라면 산벚나무의 내밀한 마음도 곁에 와 설 듯하다. 산벚나무는 단 며칠 동안 치열하게 꽃을 피우기 위해서 일 년을 기다려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이 다한 후에는 바람에게 꽃잎을 주어 꽃들을 지상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무성한 잎을 피워 자신의 존재를 지우며 숲으로 돌아갈 것이다. 산벚나무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시간은 꽃을 피우는 시간뿐이다. 그 시간을 위해 어둠과 과 폭풍우, 폭설의 긴 동면을 견디어 왔을 것이지만 산벚나무는 제 긴 고통의 시간들을 소리 내어 드러내거나 큰 목소리로 노래하는 법 없이 그저 묵묵히 순은純銀을 닮은 꽃잎만을 무장무장 피워낼 뿐이다. 새벽의 대기처럼 맑은 빛을 띈 산벚나무의 꽃잎은 눈처럼 차갑고 정결한 향기를 뿜어낸다. 그 빛깔과 향기는 숲을 압도하거나 어지럽히지 않고 산짐승의 잠을 깨우지도 않는다. 그저 고요한 침묵으로 제 안을 들여다보는 자세로 세상 한 귀퉁이에 서 있을 뿐이다. 산벚나무의 꽃잎 속에는 달빛과 별빛을 키우는 서늘한 산의 침묵이 깃들어 있다. 산벚나무의 향기는 소리 없이 산을 가로질러 가며 꽃들의 잠을 깨우고 숲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바람의 내음을 닮아 있고 산벚나무의 몸피는 깊은 밤 겹겹 어둠의 결들과 한낮의 햇빛이 아로새겨진 듯 검고 또 흰 빛깔을 두르고 있다. 그러므로 꽃피운 산벚나무의 부드럽고 둥근 자태는 산의 언어이자 바람의 몸짓, 나직한 숲의 노래일 것이다. 나는 그저 말없는 풍경 속에 앉아서 침묵으로 들려주는 산벚나무의 노래를 듣고자 한다. 한 그루의 조그마한 나무가 들려주는 시와 잠언, 나직나직한 춤과 노래에 닫힌 몸과 마음을 열고 싶은 것이다. 들릴 듯 안 들릴 듯한 산벚나무의 묵언은 세상에 숨어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큰 갈채와 눈부신 스포트라이트가 없어도 세상 어디엔가 숨어 묵묵히 자신의 일을 성취해 나가고 있는 이들, 무성한 욕망의 시간들 너머에서 빈 마음으로 자신만의 꽃을 피우고 또 사라지는 이들의 자화상에 관해 산벚나무는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결코 소외되거나 버려진 게 아니라 오로지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가진 시간과 자신이 선 자리를 사랑하며 그것이 삶에 자신만의 무늬를 새기는 일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산벚나무는 산중에 홀로 서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숲 속 어느 곳에 수많은 산벚나무들이 어둠에 불을 밝히듯 꽃을 피우고 서있을 것이므로. 이제 산벚나무는 말없이 몇 장의 꽃잎을 어깨 위에 떨어뜨린다. 나비처럼 날아 내린 그 꽃잎들은 꽃이 지고 봄이 지난 후에도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지치고 메마를 때마다 성큼성큼 잠 속으로 걸어 들어와 흰 불씨같은 꽃잎들을 흩날리며 어두운 꿈을 밝혀 줄 산벚나무 한 그루. 산모퉁이를 돌아 한참이나 달려갔지만 산벚나무는 여전히 국도변에서 멀리 떨어진 숲 한가운데 흰 등불 같은 꽃을 피우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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