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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한국 과학소설
· ISBN : 9788984318540
· 쪽수 : 472쪽
· 출판일 : 2014-11-25
책 소개
목차
강철 무지개
해설: 빵과 서커스로 통치되는 세계에 맞서는 아나키스트의 존재학 - 홍기돈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SS 울트라마켓은 9층 건물 크기의 정연한 기계였고, 그들은 그 속으로 들어가 일부는 잠깐 사이 무엇인가를 소모하고, 혹은 소모당하고 빠져나왔고, 또 다른 일부는 하루 가운데 대부분을 그 가운데에서 소모하고, 또는 소모당하고 빠져나왔다. 소모하는 것은 소모당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모당하면서 소비한다고 믿었고, 소비하면서 소모당한다고 불평했다. 또는 자랑스러워했다. 섭취와 배설이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생리적 과정이라면, SS 울트라마켓에서 벌어지는 진지하고 기계적인 행사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락시킬 수 없는 사회적・기계적 과정이었다.
카드예요, 현금이에요? 지니가 물었다. 돌연 장난기가 발동한 탓이었다. 자신에게도 낯선 그런 장난기는 적어도 일부는 제임스 탓이었다. 그의 무엇인가가 지니를 자꾸 가볍게, 유쾌하게 만들었다. 제임스의 느린, 무거운 움직임과 반응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 자꾸 그녀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번에도 지나치게 오래 지니를 쳐다보았다. 낯선 지방의 지도를 읽기 위해 애쓰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그 얼굴에 대고 지니는 다시 말했다. 일시불이에요, 할부예요? 곧 제임스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신속배달 안전보장입니다. 두 사람은 곧 알아들었다. 이 여자는 계산원이다. 이 남자는 배달기사다. 그들의 말은 그들이 입는 제복 같았다.
그들에게 허용된 삶의 방식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도, 삶도 부정해야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이 없는 삶, 이를테면 캄캄한 삶, 삶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삶을 버려야만, 그들 스스로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비로소 아슬아슬 생존이라는 밧줄에 매달려 있을 수 있었다. 그들 자신을 긍정하려 들면 세계가 그들을 부정했다. 그들 자신이 존재할 틈이 없었다. 세계에는 그들의 삶이 포함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세계에 버림받았고, 세계에 매달려 있는 사이 그들 자신에게서도 버림받았다. 그들 자신을, 삶을 긍정하는 유일한 길은 이 세계를, 그곳에서의 생존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생존의 밧줄을 놓아버리는 길뿐이었다. 기묘한 일이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