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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84374096
· 쪽수 : 448쪽
· 출판일 : 2020-08-10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친절은 나와 거리가 멀어. 파리에서 지내는 건 자네의 생에서 마지막으로 맛보는 ‘자유’가 될 거야. 결국 자네도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처럼 삶에 순응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서 살게 될 테니까.” 
폴 모스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이내 호텔 정문이 소리 내며 닫혔고, 폴은 떠났다. 
나는 폴의 방으로 들어갔다. 1백 권이 넘는 책들, 다양한 종류의 펜들, 노란색 노트 더미들, 검정 수첩 예닐곱 권, 모눈종이, 아직 따지 않은 레드와인 네 병, 자두 술, 브랜디 두 병이 있었다. 폴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남긴 잔여물들을 보고 있자니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우리가 축적해온 모든 것, 우리가 맺어온 모든 관계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걸 두고 떠나야 한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운명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남은 건 ‘지금 여기’뿐이다.
미래? 사랑에 빠지면 눈앞에 있는 현실만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필사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미래를 꿈꾸게 된다. 실현 불가능한 미래에 대해 끝없이 집착하게 된다. 
이자벨과 미래를 함께하려면 현재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미래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하나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큰 부침을 겪는 순간에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건 자명하다고 봐야 한다. 이제 내 머릿속은 동 트기 전의 하늘처럼 명료해졌다. 
‘이자벨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어서는 안 돼. 지금 주어진 조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만이 나에게 허용된 전부야.’ 
냉정한 깨달음 뒤에 슬픔이 따라왔다. 그런 한편 기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오직 이자벨만 바라보거나 ‘단 한 사람’에게 내 인생을 바쳐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만약 이자벨이 미래를 함께하자는 내 시나리오에 동의한다면 나 역시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자벨은 ‘단 한 사람’이라는 범주에 자신을 끼워 넣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겠지만 나에게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이자벨이었다.
‘나중에 너도 결혼하면 알게 될 거야. 알렉상드르 뒤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결혼이라는 사슬은 대단히 무거워서 들어 올리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나는 엄마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 그저 엄마와 내가 공유해야 할 비밀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만 알았지. 엄마가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없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어.” 
이자벨이 담배를 끄고 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과거를 되풀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엄마는 생의 목표였던 박사 학위를 따지 못했어. 나도 그랬지. 엄마는 영원한 사랑을 믿었기에 결혼했어. 나도 그랬지. 샤를이 나를 자기 여자로 만들고 나면 원래 그가 속해있던 부르주아 생활로 돌아가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 예순여섯에 폐기종으로 숨을 거둔 엄마처럼 나 역시 ‘비밀의 화원’을 갖게 되었지. 샤를이 전부인과 이혼하기 전에 이 작업실을 나에게 사주었고, 우린 여기서 만나기 시작했어. 결국 나는 여기서 나대로 샤를은 샤를대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지. 샤를이 초혼 때 했던 방식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거야. 나도 내 과거를 되풀이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나는 사랑을 되풀이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