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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외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88984374881
· 쪽수 : 548쪽
· 출판일 : 2024-06-25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는 일곱 살에 문(door)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대문자로 쓸 걸 그랬다. 이 문은 하얀 타일이 깔린 부엌으로 이어지거나 침실 벽장에 달린 지극히 평범한 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일곱 살에 문(Door)을 발견했다. 보라. 이제 지면에서 문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크고 당당하게 서 있는지. D의 둥그런 부분은 백색 공허로 이어지는 검은 아치문 같다. 이 단어를 보면 아마 여러분은 살짝 오싹할 정도의 익숙한 느낌에 목덜미 솜털이 곤두설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나무로 만든 이 노란 책상 앞에 앉은 나도, 책갈피를 찾는 독자처럼 책장을 휘리릭 넘기는 짭조름하면서 달콤한 산들바람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 살갗을 구불구불 복잡하게 가로지르는 흉터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 이름조차 모를 것이다(내 이름은 재뉴어리 스칼러다. 이제 여러분도 나에 대해 조금은 알았을 테지만 대신 요점은 흐려졌다).
하지만 문(Door)이라는 단어를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도 알 것이다. 어쩌면 그런 문을 직접 봤을 수도 있다. 오래된 교회의 반쯤 열린 썩은 문, 혹은 벽돌 벽 속에서 표면에 광택제를 발라 반짝이는 문. 만약 여러분이 상상력이 풍부해 자기도 모르게 두 발이 뜻밖의 장소로 데려가준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문을 통과해 아주 뜻밖의 장소에 가본 적도 있으리라. 아니면 평생 그런 문은 흘낏 본 적조차 없을 수도 있다. 요즘에는 예전과 다르게 그런 문이 많지 않다.
그래도 그런 문이 있다는 사실은 알 것이다. 안 그런가? 왜냐하면 세상에는 일만 개의 문에 얽힌 일만 개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는 자신의 이름처럼 그 이야기를 잘 알기 때문이다.
발아래 밟히던 흙이 쓰러진 풀로 변했음을 깨달은 순간, 마구 휘돌던 두 다리가 멈췄다. 나는 웃자란 풀이 무성하고 인적 없는 들판에 서 있었다. 머리 위 하늘은 어찌나 푸른지 아빠가 페르시아에서 가져온 타일이 생각났다. 이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해서 내가 빠질 수 있을 정도로 깊고 영롱한 푸른색이었다. 그런 하늘 아래로 녹 같은 적갈색 풀들이 물결쳤고, 드문드문 솟아 있는 삼 나무 몇 그루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이 풍광이 만들어내는 느낌 ―햇볕을 받은 마른 삼나무의 진한 향, 오렌지색과 푸른색으로 이뤄진 암컷 호랑이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풀들― 때문에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메마른 나무줄기에 뚫린 구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 사슴처럼. 나는 양손으로 야생 곡물 맨 위에 주름 장식처럼 달린 이삭들을 훑으며 더 깊은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문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 원래 문은 그런 법이다. 누군가 똑바로 바라보기 전까지 반은 그늘에 잠긴 채 비스듬하게 서 있다.
이 문은 사실상 낡은 목재 문틀만 남아 있었는데 트럼프 카드로 집을 만들 때처럼 삼각형 모양이었다. 경첩과 못은 부식되어 거의 사라졌고, 그 주위에 녹슨 얼룩만 점점이 남아 있었다. 문 자체는 용감한 널빤지만 몇 장 남아 있을 뿐이었다. 벗겨진 페인트가 아직 문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하늘과 같은 감청색이었다.
당시 나는 이런 문에 대해 전혀 몰랐던 터라 설사 여러분이 그걸 직접 목격한 자들의 보고서에 주석을 달아서 만든 세 권짜리 책을 주었다 해도 믿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들판에 너무도 외롭게 서 있는 그 너덜너덜한 푸른 문을 봤을 때 저 문 너머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터키주 나인리가 아닌 다른 곳,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 너무 광대해서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소리를 따라 파라오 룸이라고 이름 붙은 2층 거실로 갔다. 로크 씨의 방대한 이집트 소장품이 보관된 방이었다. 붉은색과 푸른색 손궤, 날개 모양 손잡이가 달린 대리석 단지, 가죽 줄이 달린 황금색 작은 앙크 십자가, 무너진 신전에서 홀로 살아남은, 조각된 석조 기둥. 이 거실은 전체적으로 황금빛 광채가 감돌았다. 심지어 어스름한 여름밤에도.
그 소리는 거실 남쪽 구석, 아직 내 푸른색 보물 상자가 있는 곳에서 났다. 주추 위에서 상자가 덜커덕거렸다. 상자에서 수첩을 발견한 뒤로 나는 이따금 상자 주변을 돌면서 먼지 냄새가 나는 그 깊숙한 안쪽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사지에 작은 나무 막대가 달린, 종이로 만든 꼭두각시가 들어 있었다. 이듬해 여름에는 러시아풍 왈츠가 흘러나오는 자그마한 뮤직 박스가 들어 있었다. 그다음에는 알록달록한 구슬이 달린 작은 갈색 피부의 인형, 그다음에는 삽화가 있는 프랑스판 《정글북》이 들어 있었다.
로크 씨에게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물건들이 로크 씨의 선물이라고 확신했다. 선물이 가장 필요한 시기, 이를테면 아빠가 또 내 생일을 잊어버렸다든지 명절에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든지 할 때 딱 맞춰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말 없는 위로를 건네려고 내 어깨를 잡는 로크 씨의 어색한 손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로크 씨가 일부러 상자 안에 새를 숨겨놓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상자 뚜껑을 들어 올렸더니 마치 작은 대포에서 발사된 듯한, 회색과 황금색으로 이뤄진 무언가가 내 앞으로 튀어 올라 거실 벽을 스치며 날아다녔다. 깃털을 잔뜩 부풀린 연약한 새였다. 머리는 마멀레이드 색에 다리는 막대기처럼 길고 가늘었다. 나중에 그 새를 찾아보려 했지만 오듀본의 책에 비슷해 보이는 새는 없었다.
나는 상자 뚜껑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뚜껑이 떨어져 닫히는 순간, 그 안에 무언가가 더 있음을 깨달았다.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