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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사일반
· ISBN : 9788990024916
· 쪽수 : 540쪽
책 소개
목차
상권
서론 6
1. 시초 15
2. 고대 그리스 38
3. 공화정 시대의 로마 58
4. 제정 초기의 로마 86
5. 이슬람 131
6. 중세 이탈리아 154
7. 기독교의 반격 195
8. 두 종류의 이산 241
9. 스투포르 문디 260
10. 우트르메르의 종말 296
11. 중세의 끝 324
12. 콘스탄티노플 함락 360
13. 가톨릭 부부 왕과 그들의 이탈리아 모험 393
14. 왕, 황제, 술탄 429
15. 바르바리 해적과 바르바로사 459
16. 몰타 섬과 키프로스 섬 492
왕가 가계도 522
지도 530
하권
17. 레판토 해전과 에스파냐의 음모 7
18. 크레타 섬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39
19.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72
20. 지브롤터 공방전 118
21. 청년 나폴레옹 145
22. 나폴리 간주곡 179
23. 나폴레옹 이후의 이집트 190
24. 유럽의 재편 209
25. 그리스 독립전쟁 228
26. 무함마드 알리와 북아프리카 279
27. 콰란토토 291
28. 리소르지멘토 307
29. 이사벨 여왕과 카를로스파 352
30.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 372
31. 발칸 전쟁 382
32. 제1차 세계대전 410
33. 파리평화회의 440
옮긴이의 말 448
왕가 가계도 452
지도 460
참고문헌 470
찾아보기 477
책속에서
트로이 전쟁에 관해서는 역사적 증거, 아니 역사적 증거라 할 만한 것들도 남아 있다.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족이 남겨놓은 기록에 기원전 13세기 무렵 미케네가 소아시아에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한 사실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히사를리크 유적지에서 발견된 아홉 개 유적층 가운데 여섯 번째 층에서 드러난 도시(일반적으로 호메로스가 말하는 트로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곳이다)에도 처참한 종말을 맞았음을 보여주는 갖가지 징표가 나타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슐리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유적층을 계속 파내려가 발굴이 끝나기 이틀 전 두 번째 층에서 다량의 황금보물을 발견하는 횡재를 만났다. 그는 나중에 그것을 트로이의 헬레네가 썼던 장신구라고 세상에 공표했다. 그것도 모자라 용모가 빼어난 그의 그리스인 아내-실물도 보지 않고 아테네에서 우편주문으로 구한 아내였다-의 몸에 그것들을 걸치도록 한 뒤 사진까지 찍어두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알다시피 프리아모스 왕 시대보다 1,000년이나 앞선 시대의 것이었다. 딱한 슐리만, 그것도 모르고. - 상권 p.32~33 중에서
로마인들 사이에 카이사르는 교양 있는 지식인, 원로원의 뛰어난 웅변가, 빚을 내서라도 후하게 선심 쓰는 인물, 남녀를 가리지 않는 소문난 바람둥이, 그럼에도 로마의 대신관(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에 뽑힐 만큼 정치수완이 능란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간단히 말해 그는 유능하고 매혹적이었으나 신뢰감은 없는 인물이었다. 기원전 60년 카이사르는 에스파냐에서 로마로 돌아왔다. 에스파냐에 총독으로 있는 동안 몇 차례 소소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어 개선식을 거행하기로 약속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집정관에 입후보하려면 개선식이 치러지기 오래전에 로마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고 그러자면 [속주 총독 사임과 함께 군사지휘권도 내놓아야 했으므로] 개선식의 권리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입후보를 대리인이 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그 문제를 돌파하려 해보았으나 그 요청은 기각되었다. 그러자 그는 개선식의 권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로마로 직행했다. 카이사르에게는 영광보다 권력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 상권 p.71 중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726년 초대 도제가 취임하여 1797년 마지막 도제가 사임할 때까지 1,071년 동안 존속했다. 그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존속기간보다 50년 짧은 기나긴 기간이었다.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베네치아는 정치적?입헌적?상업적?예술적?건축학적으로 세계의 불가사의가 되어 지중해의 안주인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그런 나라 국민들답게 천년의 사직이 무너져 내리려 할 때 투르크족에 맞서 식민지를 방어하며 곧잘 보여주던 용기와 인내라든가 50여 년 뒤 그들 자손이 오스트리아군에 대항하며 보여주던 투혼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었다면 멸망이 그처럼 치욕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성벽에서 보여준 비잔티움 시민들의 영웅적 저항까지는 아니더라도 옛 베네치아의 기상을 조금이라도 펼쳐 보였다면 세레니시마는 명예로운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마저도 보여주지 못했다. 베네치아가 맞은 최후의 비극은 멸망이 아닌 멸망한 방식에 있었다. - 하권 p.164~165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