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기타 국가 소설
· ISBN : 9788991310421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12-09-03
책 소개
목차
1. 전지전능한 할머니가 죽었다
2. 노인과 아이
3. 이사
4. 알타몬트를 지나는 길
옮긴이의 글
리뷰
책속에서
그때부터 어쩌면 내 마음 속에 엉킨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늙어 가는 동시에 두 번째 유년시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집에 살고 있던 사람이 정말 할머니인지에 대해서는 그때까지도 반신반의하던 터였다. 그래서 할머니를 좀 더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할머니한테는 더 이상 ‘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걸 ‘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가 할머니 말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중에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털어놓는 속내 이야기를 더는 못 듣게 되면 아쉬워할 거라고, 그것이야말로 살면서 몇 번 주어지지 않는 더없이 귀중한 보물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엄마와 할머니가 나누는 그 보물 같은 속내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두 사람은 밖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알아들은 대화는 이게 전부였다.
엄마 : 엄마 나이가 되면 삶이 어떻게 보여요?
할머니 : 꿈처럼 보인단다, 얘야. 그저 꿈처럼 보일 뿐이지
“오늘 넌 누구니?”
이렇게 할아버지는 내가 그저 나만이 아닐 때가 많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다. 사람들이 말을 거는 그 순간, 나는 지저분한 빨랫감을 이리저리 걷으러 다니는 중국인 세탁소 주인도 될 수 있었고, 내 머릿속에 맴도는 특유의 억양으로 온 사방에다 대고 “바나니아, 바나니아”하고 목청 높여 외치고 다니는 늙수그레한 이탈리아 출신 도붓장수도 될 수 있었다. 또 예쁜 공주님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눈에 띄는 유명인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라 베랑드리’예요. 오늘 전 ‘라 베랑드리’라고요.”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발에 닿는 촉감도 보드라운 드넓은 모래밭 위에 도착했다. 앞에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수평선 이쪽에서 저쪽까지 호수가 끝없이 펼쳐졌다. 그저 물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던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는데, 바로 그 특유의 소리를 들려주던 호수가 조용히 침묵을 지키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지치지 않는 속삭임과 고요한 침묵의 느낌이 어떻게 이리도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것일까? 난생 처음으로 그 커다란 호수에 다녀온 뒤로 나는 이 주제에 사로잡혔지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아니, 그날보다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었는지조차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