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92219662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17-03-30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이기적 유전자
팽목/ 심포리역/ 봄날은 안녕하다/ 이기적 유전자/ 종점식당/ 폐광지대/ 오래 두고 온 저녁/ 여기/ 통리/ 사끼야마/ 노선/ 이장移葬/ 철로변/ 장례희망
제2부 에콰도르
내밀內密/ 사양斜陽/ 그래도 그런 게 아니라는/ 꽃과 함께 아물다/ 시간의 속성/ 에콰도르/ 암전暗轉/ 문득/ 바람의 눈물/ 별리/ 예지의 능력이 깊어지는 밤/ 한로寒露/ 추석秋夕/ 지독한 문장
제3부 벼랑길
자화상/ 무너져 내리다/ 5억 원은 있어야 편안한 노년/ 벼랑길/ 영정사진 찍는 노인들/ 외 다수/ 하관下棺/ 배회하는 저녁/ 피항避港/ 갑골문甲骨文/ 불멸의 허밍/ 고종사촌 형/ 선로에 그녀를 밀어 버린 저 사람
제4부 단주후회
로드 킬/ 남도전언南道傳言/ 단주후회/ 이기의 발달사/ 사각死角지대/ 사력을 다해/ 쓰임에 대하여/ 죽변竹邊/ 사구砂丘를 지나다/ 자본주의적 약속/ 버려진 소파에 앉아
저자소개
책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 명확한
도축장 한 귀퉁이
벙글 대로 벙근 목련 진다!
그 그늘아래 조팝꽃 한창이다
죽음 대수롭지 않은 여기
목 떨어지고 다리 잘린, 속내까지 다 파헤쳐진
핏빛 축생의 응고되지 않은 주검을
이리저리 끌고 밀며 다니는 내가 안녕하듯
저렇게 지는 꽃그늘 속 또 다른 생은 안녕하다
세상 어느 귀퉁이에는 누군가의 찬란한 치장을 위해
팔 다리 잘린 아이들이 절룩절룩 자라고
그 애비들 평균 수명은 마흔이 채 되지 않는다는데
그토록 비참한 얘기마저 이 봄 같은 홀망한 날
막 봉오리 터뜨린 여남은 송이 철쭉처럼
군데군데 자줏빛 핏방울 번지는 작업복 위로
이 살풍경의 배후 같은 햇살이 기울고
그 사이 꽃잎 몇 장 더 떨어지고
떨어진 꽃잎 몇 장 끌고 다른 꽃을 밀어 올리며
이렇게 안녕하신 봄날은 가고 있다
― 「봄날은 안녕하다」 전문
바람이 읽어 내리는 경전 소리인 듯
촌스러운 얼룩무늬 차양 펄럭이는
그 집 추녀 끝으로
막 점등한 알전구 불빛 같은 노을
깃드는 저녁
듣는 이 없는 늙은 중의 염불처럼
혼자 웅얼대는 텔레비전 소리 등지고 앉아
조림반찬 몇 가지와 장국 한 그릇 놓고
오랜 중독처럼 혼자 먹는 밥
미명微明을 허물듯 밥을 허물면
바닥을 드러내며 점점 가벼워지는 밥그릇
종점이란 말도 이곳으로 오는 모든 길 위에
제 몸을 다 비우고 마침내 본산本山에 이르는
순례의 다른 말인 듯하여
여기서 몸 수그리며 밥 먹는 일은
길 나서는 세상 모든 허물어지는 것들에게
뼈마디처럼 단단한 마음을 다해
간절한
아주 간-절한 경배를 올리는 일
― 「종점식당」 전문
시간이 허수란 걸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오래전이 언제인지 알 수 없듯
놀 깃드는 바다나
놀을 등진 채 물들어가는 세상이란
아주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윽고 찾아드는 어둠조차
어제 쓰다 버린 것을
다시 기워 쓰는 재활용품
애초 없는 것들이 지금 어디에나 있고
당신에 대해 그에 대해
당신과 그가 나에 대해
어떤 견해를 말하든
그건 또 다른 모른 척일뿐
환상통을 앓듯 습성이 되어 버린 고통이 지겨워
사람들은 자꾸만 죽는다, 이제
죽음보다 오래 산 사람들의 말을 끊어버리고
더 이상 믿지 않음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지
착란을 생이라고 우기며 몰락한 과거와
오래전 들켜버린 시든 미래 사이에서
배회하듯 살아내는 것만큼
안전한 생은 없을 것이다
― 「배회하는 저녁」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