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2680226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09-01-06
책 소개
목차
카페 징검다리
낯익은 일상에 관한 전설 하나
창(窓)
페넬로페를 위하여
티베트미술관에서
새벽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한 여자'가 있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서는 지나치게 진부하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지워 버리거나 다른 문장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멸의 위기를 맞은 한 사람의 자아가 자신의 방어능력을 총동원하여 더욱 견고한 성(城)을 찾아 숨으려 한다면, 타자야말로 가장 빠른 지름길일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통합적인 조망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타자의 시선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자아를 이끌어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한 여자’는 나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며 종국에는 내 자아에로 이르는 지름길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빠른 길이라 할지라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간은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다. 그렇다면 시간 안에서 파악되어지는 존재들은 모두가 자신에게 통로이며 스스로 그 통로를 지나 흐르는 서사의 물줄기다. 강이든 내든 개울이든. - 소설 '카페 징검다리' 중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오빠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야 나는 내가 선택해야 할 방법으로서의 길이 무척 협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날 밤은 긴긴 세월의 기다림 끝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품은 페넬로페처럼 승리감에 취했더랬습니다. 다시는 천을 짰다 풀었다 할 일이 없으리라, 턱없는 기대감으로 부풀기도 했지요.
풋. 당신의 비웃음이 들리는군요.
넌 키르케야. 넌 칼립소야. 모처럼 얻어걸린 행운을 움켜쥐고 오디세우스를 가두려고 했던. 페넬로페는 기다림으로, 오로지 기다림으로 자기 천을 완성했어. 넌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어. 당신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싶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당신을 더는 참아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색적인 욕설과 내 눈길을 피하지도 않고 들이대는 손가락들과, 무엇보다도 마지막 남은 옷자락의 윤곽조차 흐릿해 가는 오빠를 견디면서까지. - 소설 '페넬로페를 위하여' 중에서
창들이 불을 밝힌다. 똑같이 생긴 팔 십 개의 정교한 사각형들이 다투어 어둠을 몰아내느라 분주하다. 맨 꼭대기, 왼쪽 끝 창 하나만 그 분주함에서 비껴나 있다. 미세한 불빛 한 점 새 나오지 않는다. 거리로 내쫓긴 어둠이 떼를 지어 그쪽으로 몰려간다. 두텁게 달라붙은 어둠은 사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창은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소리 없이 제 모습을 지운다. 한두 점씩 희끗거리며 날리던 진눈깨비가 창틀 위에서 하얀 실루엣으로 덩어리진다. 사내는 마우스 위에 다시 손가락을 올린다. 밤이 오고 있다. - 소설 '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