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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외국 과학소설
· ISBN : 9788993042030
· 쪽수 : 512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그리고 에필로그
에피소드1 바람을 기다리는 언덕
에피소드2 물길잡이의 바다
에피소드3 어두운 달빛
에피소드4 죽음의 소리
에피소드5 물길잡이가 부르는 소리
에피소드6 머나먼 빛
에피소드7 항아리 속의 희망
에필로그, 그리고 프롤로그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하지만 아카네 씨. 딱 한 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그의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도시’가 그를 놔주면 기억은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때를 기다릴 수 있다면…….”
시라세의 말이 중간에 끊어졌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기억. 그것만을 바라며 기다려야만 하는 세월은 너무나도 잔인하다고 생각했으리라.
아카네는 멍하니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발길이 향한 곳은 가즈히로의 아틀리에였다. 방 한복판에는 그리던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언젠가 그가 이 캔버스에 나를 그려줄 수 있을까. 그때를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가즈히로를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 몇 십 년은 이어질지도 모르는 ‘오염’. 과연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한때의 감정만으로는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가즈히로는 애인에 대한 기억을 잃은 채로 상실감만 안고 살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아카네마저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카네는 앞으로 같은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눈앞에 있고, 만질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는데 기억을 공유할 수 없는 가즈히로와 함께 살아가려면.
캔버스 앞에 서서 ‘차렷’ 자세를 취하고 아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즈히로의 방으로 돌아왔다. 시라세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아카네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아카네가 말했다.
“잠시 단둘이 있게 해주세요.”
머리맡에 있는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가즈히로의 뺨으로 살며시 손을 뻗었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가즈히로가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카네는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말을 걸듯이.
“내가 살아가며 해야 할 역할을 이곳에서 해낼 테야.”
바람을 기다리는 집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잠시 머무는 ‘바람을 기다리는 항구’다. 여기서 잃어버린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나도 기다리자. 기다리고 싶다. 언젠가 가즈히로의 기억이 돌아와 둘이서 지낸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그날을. 그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고 내 소망이다.
“게이코. 이제 일을 그만두면 어떻겠나? 자넨 충분히 역할을 했네. 더 이상 도시의 오염에 노출될 필요가 없어. 자네만 괜찮다면 내가 마지막으로 국무원에 요청을 하지.”
통감이 상급관청의 이름을 입에 올렸지만 게이코는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존재를 다시는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멸의 연쇄를 단절하기 위해서라도 살아갈 겁니다. 마지막 그날까지.”
그런 생각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따라다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한 비장한 체념이나 규칙에 따르려는 사명감 같은 것은 이제 옅어져 있었다. 대신에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겠다는 의지가 그 빈 공간을 메웠다.
“만약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시의 소멸을 막을 수가 없다면, 그래도 자넨 도시의 소멸과 계속 싸울 텐가? 오염 때문에 자기 목숨마저 깎아내 가면서도?”
통감이 다시 물었다. 그 말에 머리맡에 있던 소노다가 반응을 보였다. 뭔가를 감정하는 듯한 눈으로 게이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령 내일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 순간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갈 겁니다. 분명 누군가가 제 뒤를 이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게이코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 소멸자란 ‘도시에 휩쓸려 사라진 사람들’일 테지만 ‘도시’ 입장에서 보면 평화롭고 차분한 세상으로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니 ‘도시’는 우리가 소멸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도시’와 함께 살아가려고 생각합니다.”
테라스에서는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고 어떤 사람은 난간에 기대어 제각각 선율을 듣고 있었다.
조용한, 마치 부처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미소를 직고 있던 가즈히로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산들바람의 흐름에 실려 보내듯 소리를 자아냈다.
밤하늘로 녹아들어가는 선율이 멀리, 또는 가까이서 사람들을 부드럽게 껴안듯이 감쌌다. 노조미의 마음속에 있는 뭔지 모를 응어리마저도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그 음색은 단순한 ‘치유’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나 고통이 있음을 알려주는 소리였다. 그것들을 껴안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굳은 의지가 담긴 선율이었다.
고주기의 선율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고 한다. 시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을 엮어 빚어내는 고주기의 음색. 노조미는 거기서 소멸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를 본 기분이 들었다.
노조미는 고개를 돌려 사라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에 비친 그 도시는 불빛 하나 없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시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라질 운명에 따르면서도 내일로 희망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숨결을.
사람은 사라져도 희망은 이어져 간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다. 노조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주기의 음색에 이끌린 듯이 도시에서 바람이 언덕 위로 불어왔다. 노조미의 앞머리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