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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93506778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13-04-15
책 소개
목차
정동호
가치와 가격
맛 좋은 수박 16 / 가치와 가격 19 / 군자란 23
달밤의 목련화 25 / 담쟁이 28 / 모기지론 31
도심에 핀 꽃 35 / 문패 38 / 오십 보 백보 41
지룡이 43 / 손에 손 잡고 46
바다보다 넓은 그대 49
나는 어떤 돌인가 52
날몰
날몰 58 / 고향 앞 정자나무 62 / 남강물 65
어느 농사꾼 할머니 이야기 68
아버지의 소 판돈 71 / 어머니의 머리 75
인생길 78 / 참새 떼 이야기 82
아름다운 틈새 85
천왕봉
천왕봉 90 / 마라도 단상 93 / 몽돌의 노래 97
선운산 천마봉 100 / 아! 순천만 102 / 염원 105
동토의 땅 108 / 미완성의 돌탑 111
상하이 114 / 골동품 117 / 종묘 120
도혜숙
봄이 오면
봄이 오면 126 / 구겐 베리아 128 / 하나에서 하나로 131
봉숭아 꽃물 134 / 꽃샘 바람 137 / 어머니의 봄 140
소금 민들레 144 / 이야기 쌈지 146
날을 세우며
날을 세우며 152 / 자투리 155 / 삼베적삼 158
벙거지모자 161 / 주름 펴기 165 /
소통언어 169 / 박쥐 172 / 복숭아 유감 176
하도롱 빛 연가 179
숭늉 이야기
숭늉 이야기 184 / 이름 없는 사람 187
시원한 바람 191 / 도투마리 195 /
지돌이 198 / 버스와 나룻배 200 / 고추장 204
김치 207 / 아리랑 210
서평 216 / 230
책속에서
마흔이 넘도록 이름값도 못한 것이 서랍 구석에서 나왔다.
이 동네 저 동네 이집 저집 십여 차례나 이사 다니면서 버린 것도 많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없어진 것도 있지만 끈질기게 붙어 다닌 것이다. 집안 정리를 하던 중에 큰 연필통 모양의 퇴색한 골판지 박스 하나 들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 속에 갇혀있는 검붉은 바탕에 해서체 나의 이름 석 자, 포마이카 칠을 한 탓에 아직도 금장색이 반짝거린다. 결혼하고 첫 살림을 사글셋방에서 시작하던 70년대 초반의 일이다. 방세가 더 싼 집은 어딜까. 부엌이 따로 있는 반듯한 셋방은 없을까. 직장이 가깝고 심성 좋은 주인이면 더 좋을 텐데……. 아내와 둘이서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기웃거리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요즘도 내 집 마련을 소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당시 내게도 그게 가장 큰 소망이었다. 감히 꿈도 못 꿀 때임에도 남의 집 대문 앞에 걸려있는 문패를 볼 때마다 부러움이 솟구쳤다. 언제쯤 나도 저런 문패를 달아볼 수 있을까.
내 이름 석 자 붙어 있는 작은 대문 안에 들어서면 철따라 아름다운 꽃이 피고 예쁜 정원수가 어우러진 아담한 나의 집. 그 시절 사무실에는 잡상인들이 심심찮게 들락거렸다. 월부 책을 팔고 양복을 주문 받는 사람, 구두를 맞추라거나 심지어 도장도 파고 문패도 만들어 주는 이들이 직원들을 골라가며 귀찮게 굴었다. 더 이상 꾐에 걸려들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필요치 않은 것까지 흥정에 응하는 일도 있었지만, 때로는 긴요한 것도 없지 않았다.
꿈 때문이었을까, 충동이었을까. 문패 하나를 선뜩 주문하였다. 시집도 가기 전에 기저귀 장만한다는 웃음거리가 될까봐 다른 사람들 눈치 못 채게 은근살짝 만들었다. 물론 아내에게도 비밀이었으니 그의 은둔 생활은 처음부터 시작 된 셈이다.
_정동호 ‘문패’ 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전부터 해오던 산딸기농사에 더 집착하셨다. 먼동이 틀 때부터 땅거미가 앉을 때까지 어머니의 호미는 땅에 떨어진 풀씨가 뿌리 내릴 틈을 주지 않았다. 팔순을 바라보는 휘진 몸으로 일에 매달리다 보니 일철이 지나고 찬바람이 나면 다리야
허리야 하며 병원 출입이 잦았다. 이젠 저 위 산비탈에 있는 ‘삐딱밭’은 버리고 텃밭 딸기만 재미 삼아 가꾸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지만, 그래도 딸기나무에 물이 오르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파서 고생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밭에서 하루해를 보냈다. 딸기 수확이 끝나면 두툼한 쌈지를 꺼내 보이며 손 놓고 놀면 이게 어디서 생기겠냐며 좋아하셨다.
그렇게 서너 해가 지나갔다. 그 해에도 찬바람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허리가 뻐근하다며 벽을 기대고 눕더니만 일어나지를 못하셨다. 허리에 힘이 가중되어 척추에 이상이 생겼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비탈진 밭고랑을 오르내리느라 무리해서 생긴 탈일 것이었다. 한 달이나 입원을 했다. 절대로 힘든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의사는 당부했다. 이제는 딸기농사에서 손을 떼라고 병실에 누어있는 어머니를 설득했지만 내말은 귀를 스치는 바람일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퇴원하기 전에 ‘삐딱밭’ 딸기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퇴원을 하고, 며칠이 지났다.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혈육을 잃은 듯이 통곡을 하셨다. 민망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방문을 닫는 나를 따라 나와 하염없이 내 귀를 잡아 당겼다.
_도해숙 ‘어머니의 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