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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93866278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1-06-15
책 소개
목차
컬러화보
이다해, 김승우, 박유천, 강혜정 사인인쇄본
미스 리플리
책속에서
[화보 이미지_ 총 24쪽, 사인 인쇄본 포함]
후쿠오카의 유흥가 뒷골목. 낡은 나무 뒷문 하나가 조심스레 열리다가 멈춘다. 문 사이로 지저분하고 눅눅한 골목길을 걸어오는 사내가 보인다. 되도 않는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비척비척 걷는 폼이 어디선가 한바탕 질펀하게 마시고 오는 길 같다. 그때 반대편에서 각목을 들고 서 있는 남자 둘이 보인다. 만취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털이범들이다.
미리는 나무 뒷문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준다. 만취한 사내의 노랫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퍽, 각목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털이범들은 사내가 걸어오던 길로 유유히 사라진다. 노래도 없고 털이범도 없는 골목길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어기적거리며 지나간다. 고양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적막만이 가득 차 있다.
미리는 그제야 나무 뒷문을 마저 열고 밖으로 걸어나와 주변을 살핀다. 아무도 없다. 주머니에서 긴 끈 뭉치와 라이터를 꺼낸다. 탁 소리와 함께 라이터에 불이 켜진다. 끈 뭉치를 풀어 나무 뒷문 안쪽으로 던진다. 끈 뭉치의 끄트머리에 불을 붙인다. 타닥거리며 조용히 타들어가는 끈을 뒷문 안쪽 고리에 걸쳐놓는다. 이 작은 불이 그녀를 구해줄 것이다.
이제 히라야마를 만나 결판을 지을 때다. 맨발에 걸쳐진 굽 높은 샌들이 또각또각 리드미컬하게 골목을 울린다. 골목 끝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다. 주류창고 앞이다. 주변을 살핀 후에 허리를 굽혀 창고의 셔터 문을 올린다. 열린문틈 사이로 창고 안에 있던 빛이 새어나온다. 미리는 셔터 문이 닫히지 않도록 근처에 있는 벽돌을 가져와 벌어진 문틈 사이에 쌓아둔다.
히라야마가 높이 쌓인 술 박스에 기대어 야비한 눈을 번득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미리는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후 히라야마 앞으로 다가선다.
히라야마는 40대 중반의 사내로 키가 작고 비대한 몸을 갖고 있다. 한때 야쿠자 조직에서 활동하다 조직이 무너지면서 야쿠자 노릇을 그만두고 현재는 브로커일을 하며 미리처럼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등을 쳐먹고 산다. 그녀가 그를 만나게 된 이유는 그녀의 양부가 진 노름빚 때문이다. 히라야마는 그녀 양부가 진 노름빚을 대신 갚아주는 조건으로 클럽 호스티스로 팔아넘겼다. 히라야마는 탐욕스럽고 음흉한 눈초리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미리는 그 끈적끈적한 시선에 몸서리친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허벅지 위까지 올라오는 짧은 스커트를 들춰 밴드 스타킹 사이에 끼워둔 돈다발을 꺼낸다. 히라야마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많이 모았다? 양아버지 노름빚도 갚기 어려웠을 텐데…….”
히라야마는 돈다발을 낚아채려고 손을 내민다. 그녀는 그것을 재빨리 등 뒤로 감추며 말한다.
“알 필요 없잖아?”
“독한 년. 그렇다고, 똥물이 털어질 줄 아냐?”
“상관없어. 더 이상 이렇게는 안 살 거니까.”
히라야마는 들고 있던 봉투를 미리에게 건넨다. 미리는 봉투를 거칠 게 낚아채 다급히 찢어본다. 신분증, 여권, 신체포기각서, 지불각서 등이 들어 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히라야마도 돈다발을 들고 손에 침을 묻혀가며 열심히 세어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트림을 하며 그녀를 쳐다본다.
“꺼억.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니까, 이 히라야마는. 하하하…….”
비위가 상한다. 미리는 빈정거리듯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며 팩 돌아선다. 히라야마는 은근슬쩍 그녀의 엉덩이를 건들며 그녀를 잡아 세운다.
“그래……. 너 같이 똑똑한 년이 부모 잘못 만나 일본까지 입양이랍시고 와선 이러려니, 억울하겠지.”
히라야마의 입에서 하수구 냄새가 진동한다. 그녀의 몸에 닿는 그의 시선은 뱀의 혓바닥처럼 징그럽다. 벗어나고 싶다. 히라야마는 이제 노골적으로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올려 비비기
시작한다.
“이자는 내고 가야지. 혼자 가서 뭘 하겠냐? 너같은 년은 자고로 나 같은 남자라도 있어야 …….”
뱀이 온 몸을 칭칭 감아 오는 느낌이다. 히라야마의 손은 기어이 미리의 맨살에 가 닿는다. 얼음동상처럼 가만히 있던 미리는 가슴께로 올라오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한다.
“잠깐!”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히라야마는 잠시 움찔한다. 미리는 그녀의 옷 속에서 그의 손을 빼며 음탕하게 말한다.
“내가 벗어.”
아무렇게나 묶여 있던 머리를 풀어헤친다. 짧은 점퍼의 지퍼를 내린다. 상의 단추를 하나하나 푼다. 히라야마가 더 이상 못참겠다는 듯이 헉헉거리며 그녀를 쳐다본다. 풀어진 상의 단추 사이로 봉곳한 가슴골이 보인다. 그녀의 손은 배꼽 밑에 있는 치마 단추에 가 닿는다. 동작을 멈춘 그녀는 하라야마를 향해 거침없이 말한다.
“벗어.”
“어?”
“벗으라고.”
“어어 어어…….”
히라야마는 허겁지겁 옷을 벗기 시작한다. 욕정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는 바지를 벗다가 포기하고, 미리를 덮친다. 거친 숨소리에 섞인 입 냄새가 참기 힘들다. 욕지기가 올라올것 같다. 히라야마의 손과 혀가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핥아대는 동안 그녀는 그의 점퍼 주머니에 있는 돈다발과 머리맡에 있는 봉투를 챙긴다. 그가 그녀의 팬티를 벗기려는 순간, 밖이 소란스럽다.
불이다, 불! 불이다 불! 사람들의 아우성치는 소리에 놀란 히라야마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바깥으로 나 있는 창문 앞으로 뛰어간다. 그 틈에 그녀는 봉투와 돈다발을 챙겨 들고 잽싸게 셔터 밑으로 몸을 굴려 창고를 빠져 나온다. 셔터 밑을 받쳤던 벽돌 탑을 무너뜨려 셔터를 닫아버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창문 안으로 사색이 된 히라야마의 얼굴이 보인다. 주먹질을
해대며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우리에 갇힌 돼지 같다. 미리는 창고를 향해 가래침을 탁 뱉으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더 이상은 아냐! 네가 아는 장미린 이제 죽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