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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예술/대중문화의 이해 > 미학/예술이론
· ISBN : 9788994207766
· 쪽수 : 624쪽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 ‘미래’의 고고학
1 무대의 모더니즘, 혹은 ‘미래’의 잔상
2 연극이란 무엇인가?
3 춤이란 무엇인가?
4 몸이란 무엇인가?
5 언어란 무엇인가?
6 극장이란 무엇인가?
7 실재란 무엇인가?
8 관객이란 무엇인가?
나오며 ― 미래로서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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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모더니즘의 질문은 무대에 ‘던져짐’으로써 하이데거가 “세상에 내던져져 있음(Geworfenheit)” 이라고 표현한 생경함을 일깨운다. 로메오 카스텔루치가 연출한 공연 작품 「지옥」(2008)에서 둔탁한 공기의 파장을 일으키며 무대 바닥으로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지는 텔레비전 모니터들처럼, 무대에 ‘던져진’ 모더니즘의 화두들은 현실에서 공명한다. 지금, 이 순간.
재현 연극의 ‘생명’이 연기자의 내면에 있다면, 오늘날의 ‘내면’은 무한한 관계의 망으로 대체되어 있다. 전통 연극의 ‘죽음’이 종교적이고 존재론적이었다면, 바르트 이후의 ‘죽음’은 문화적이고 언어적이다. ‘생명’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관객’의 몫이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저자의 죽음’이 상징하는 텍스트의 개방이 초대하는 유기적인 소통의 장이 무대에서 이루어질 때, 주인공은 더 이상 “내면을 현현하는” 연기자로 존립할 수 없다. ‘연기자의 죽음’ 속에서 ‘내면’은 더 이상 순수한 척할 수 없다. 로절린드 크라우스가 외부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순수하고 독립적인 내부를 설정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피력한 것은 순수성의 종식을 의미한다.
연기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고찰을 기반으로 하는 공연 작품에서 우리가 만나는 신체적 표현들이 ‘행동’이 아닌 ‘제스처’에 가까운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다. ‘제스처’의 언어가 촉발하는 ‘의미’의 체계는 다각적으로 열린다. 열린 소통의 세계에 들어서는 관객은 복합적인 의미의 체계를 ‘해석’하는 대신 ‘횡단’할 뿐이다. 해석이 텍스트에 종속되는 행위라면, 횡단은 ‘종속’의 조건들을 재고하는 ‘탈행위’다.
연극 장치를 재발명하고 재배치함이 중요한 이유는 이로써 이러한 ‘횡단’의 새로운 궤적을 개척하고 개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궤적 속에서, ‘내면’은 비판적 질문의 성역이 될 수 없다. ‘내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신화에 대한 재고이자 인간에 대한 통찰이다. ‘내면’의 빈자리는 사유의 새로운 지평이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한 미메시스의 근원적 원칙들을 복원하는 일이 아니다. 모방을 넘어 자연을 회복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무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관계들을 초기화하고 기존의 개념적 설정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
미메시스의 퇴색된 의미가 연극을 속박해왔음은 사실이지만, 연극의 시급한 사명은 미메시스의 근본적 의미와 기능을 소환함을 넘어 미메시스 담론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이다. 미메시스의 근원을 재고함은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단초는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으로 열려야 한다. 21세기 연극은 ‘모방’뿐 아니라 미메시스의 총체적인 틀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즉, 연극의 감각은 다양한 경로로 발생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의 새로운 관계. 사람과 예술, 사회와 예술의 새로운 관계. 시어터의 가능성은 개인과 개인의 근본적인 차이, 그리고 그 차이에 대한 본질적인 예우에 있다. 시어터는 사유이자 관계이며, 미학이자 윤리다.
연극의 무대에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