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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94353456
· 쪽수 : 632쪽
· 출판일 : 2014-06-16
책 소개
목차
혀끝에 맴도는 그 맛, 그 향기 _ 방현희
메밀꽃 필 무렵
낙엽기
성찬聖餐
마음에 남는 풍경
삽화
개살구
거리의 목가
장미 병들다
막幕
공상구락부
부록
소라
해바라기
가을과 산양
산정山精
황제
향수
일표一票의 공능功能
사냥
여수旅愁
소복과 청자
하얼빈
라오콘의 후예
산협
봄 의상
엉겅퀴의 장章
일요일
풀잎
만보
이효석 연보
책속에서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였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 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었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조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이 어두운 천지의 조화가 무엇을 재촉하는지를 내 모를 바 아니다 오늘이 올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무엇을 모르랴 내 무엇을 겁내랴 차라리 이 불측한 곳을 한시바삐 떠나구 싶다 이 무례한 고장을 얼른 떠나구 싶다 시저도 결국 세상을 떠나구야 말지 않았던가 나 역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내 세상을 떠나면 다시 구라파로 돌아가 상젤리제를 거닐고 센 강가를 헤매며 부하들과 만날 것이다 클레벨 베르티에 베시에르 오제로 뮈라 마세나 이들이 와서 나를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옛적의 영웅 스키피오 한니발 시저 프레더릭 이들과 웃고 피차의 공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 머리맡에 모시는 자 단 여섯 사람밖에는 안 되누나 목사 비갸리이와 의사 앤트말모오 몽트론 아놀드 그리고 시녀와 시복과?이뿐이란 말이냐 단 여섯 사람 하기는 튀일리 궁중에서도 내 침실을 모시는 자는 여섯 사람이었다 그때의 여섯 사람과 오늘의 여섯 사람?오늘은 왜 이리도 쓸쓸하고 경황없는고 몽트론이여 아놀드여 왜 그리들 침울한고 가까이 와서 내 맥을 짚어보라 몇 분의 시간이 남았나를 알아맞히라 목사 비갸리이여 그대도 가까이 와서 나를 위해 기도하라 마지막 기도를 올리라 목숨이 떨어지자 주가 내 손을 이끌어 그의 왼편에 앉히도록 가장 신성한 복음의 구절로 기도를 올리라 그리고 내 진한 후에 모든 것을 구라파의 내 유족에게 전해달라 어둡다 요란하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땅 위의 태양이 떨어지다 용기를 내라 탄환이 나를 뚫을 수는 없는 것이다 흠 흠으으……
“맘이 성가실 때는 시를 읽는 게 첫째라우. 난 벌써 여러 해째 그 습관을 지켜오는데 세상에 시인같이 정직하구 착한 종족이 있을까. 그 외엔 모두 악한이요 도적인 것만 같아요. 시인의 목소리만이 성경과 같이 사람을 바로 인도하구 위로해주거든요.?무얼 읽을까. 하이네? 셸리? 예이츠?”
책꽂이를 한 층 한 층 손가락으로 더듬더니 두둑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휘트먼은 어때요. 오래간만에 휘트먼을 읽어볼까요. 예이츠 들과는 다른 의미로 좋은 시인이죠. 그는 한 계급의 시인이 아니라 전 인류의 시인이에요. 아무와도 친하게 이야기하구 똑같이 사랑하는 가장 허물없는 스승이에요. 월트 휘트먼?인류가 아마두 예수 다음에 영원히 기억해야 할 꼭 하나의 이름이 이것이에요. 나는 그를 읽을 때 용기가 솟구 희망이 회복되군 해요.”
“고요한 목소리로 한 구절 읽으세요. 눈을 감구 들어볼게요.”
준보가 앉은 의자 발밑에 실은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준보의 무릎에 손바닥을 놓고 그 위에 사붓이 얼굴을 얹었다. 준보가 야트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임의의 구절구절을 낭독하기 시작할 때 실은 짜장 눈을 감고 시의 세상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