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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4년의 비원

고종 44년의 비원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

장영숙 (지은이)
  |  
너머북스
2010-08-10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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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4년의 비원

책 정보

· 제목 : 고종 44년의 비원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후기(영조~순종)
· ISBN : 9788994606002
· 쪽수 : 376쪽

책 소개

고종과 그의 시대를 새로이 조명하며, 재위 기간 내내 국왕의 권력을 강고히 하고 그 기반 위에서 왕조의 부흥을, 국권의 강대함을 꿈꿨으나 결국 성취하지 못한 비원을 잔잔하게 풀어간다. 그 속에는 파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숱하게 명멸해간 다양한 관료 군상들의 행태와 이를 지켜보며 왕권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고종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전환기의 고종, 그 다면적 평가를 위하여

1부 강학기(1863~1873년)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다

1. 갑작스런 즉위, 왕도란 무엇인가?
극적인 인생 반전, 제26대 국왕으로 즉위하다
공부, 또 공부
왕도란 무엇인가?
정신적인 지주, 아버지 흥선대원군
민왕후를 맞이하다

2. 책을 통해 바라본 세상
불안한 중화의 중심축, 중국
서양을 좇는 오랑캐, 일본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오랑캐 무리, 서양

2부 집권 1기(1874~1884년) 동도서기 개혁론을 채택하다

3. 드디어 정치의 중심에 서서
대원군을 하야시키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다
가자! 문호개방의 길로

4. 전통에 서양을 접목시키다
동도서기 개혁론의 채택
정조대왕을 이어 받으련다
개화서적을 수집하다
다양한 독서, 폭넓은 영향
통치기구의 개편과 폐지, 그리고 재창설
개화자강정책 추진, 개명군주로의 길
군통수권을 일사불란케 하라!

5. 정치적 위기와 대응
임오군란기, 한 달여 간 권좌를 대원군에 넘기다
왕후는 어디에 있는가?
정적으로 돌아선 아버지
변란과 관계된 죄는 묻지 않겠다
서로의 길이 달랐던 친청 개화파와 친일 개화파
폭풍 전야
그들만의 3일천하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치다
벗어나고 싶은 청의 굴레

3부 집권 2기(1885~1896년) 개화자강정책의 재추진

6. 또 한 번의 통치기구 개편
처족세력의 등용문, 내무부
고종은 과연 민씨들의 꼭두각시였나?
내무부 중심의 국정운영이 불러온 결과

7. 개혁과 좌절, 그리고 극복
수면 위로 떠오른 ‘조선적’ 입헌군주제
군주권은 강고하게, 민권은 최소한으로
갑오개혁기, 세 번째로 대원군에게 권좌를 양도하다
시험받는 리더십 194
왕후와 함께 군주권을 수호하다
역사상 미증유의 일대사건, ‘여우사냥’
러시아 공사관에서 재기를 도모하다

8. 비명에 간 왕후를 그리다
우아하고 지적인 왕후
병약한 순종을 향한 한없는 모성
세계정세에 기민하게 대처한 정치적 동반자
그대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오!

4부 집권 3기(1897~1907년), 대한제국의 흥망

9. 대한제국을 일으키다
구본신참은 곧 동교서법의 개혁 이념
높아진 민중의 정치의식
독립협회와의 격돌
정부를 비판하는 자, 용서치 않으리라!
유교에 기반한 과도기적 군주

10. 개혁의 물적 토대
서기의 확대 수용과 ‘광무개혁’
개혁의 물적 토대, 내장원
개혁 따로, 민생 따로

11. 개혁의 물리적 토대
개혁의 물리적 토대, 원수부
만세불변의 황제권력이여!
3만 대 100만
‘전투경찰’로 나선 군대
멀어져간 국민개병제의 꿈
친일파, 친러파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12. 왕조의 최후
높아져만 가는 전운
정권을 수호할 전위대는 없는가?
강압의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던 날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라!
군통수권 상실과 군대해산
강제병합의 그날
독살을 입증하는 빛바랜 문서들

나가는 말 ‘망국의 군주’를 넘어서서
고종 연보
미주

저자소개

장영숙 (지은이)    정보 더보기
상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高宗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Post-Doc.) 과정을 거친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한양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상명대학교 계당교양교육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술로는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2010, 선인), 『고종 44년의 비원』(2010, 너머북스), 『울릉도·독도·간도에 대한 일본의 인식』(2017, 경인문화사), 『고종의 인사정책과 리더십-망국의 군주, 개혁군주의 이중성-』(2020, 역사공간)이 있고, 「李王職의 <高宗·純宗實錄> 편찬사업과 그 실상」(2014), 「명성황후와 진령군-문화콘텐츠 속 황후의 부정적 이미지 형성과의 상관관계」(2018), 「알렌이 포착한 기회의 나라, 대한제국」(2019), 「대한제국기 고종의 豐慶宮 건립을 둘러싼 제 인식」(2020), 「친청에서 친일로, 시세에 조응한 김윤식」(2022)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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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당시 청의 황제는 고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어린 나이로 황제위에 오른 동치제(同治帝)였다. 동치제는 근대로의 과도기에 중국대륙을 호령한 서태후의 아들로, 1861년 5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고종이 즉위한 1863년을 기준으로 보면, 고종이 12세였을 때 동치제는 7세였으므로 불과 다섯 살 차이였다. 신료들은 “중국의 황제는 강관이 지쳐 병이 들만큼 밤낮으로 학문에 힘써 백성들이 모두 칭송하고 있다”면서 고종과 동치제를 선의의 경쟁관계로 이끌기도 하였다. 고종은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역사에 부끄럽지 않을 성덕군주가 될 것을 요구받는 가운데, 상당한 정신적 압박과 부담을 느끼면서 왕도 수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중략) 고종의 학문 정진을 방해하는 요인으로는 왕도 수업이 주는 심한 스트레스 외에도 첫사랑인 영보당 이씨가 있었다. 이씨는 민왕후가 순종 척(?)을 낳기 전에 이미 완화군을 생산할 정도로 고종과 사랑이 깊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왕후가 이씨와 완화군을 대궐 밖으로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씨는 늦게까지 생산을 하지 못한 왕후에게 질투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고종의 강학기는 왕도 수업에 대한 중압감과 두 여인이 내뿜는 질투와 욕망의 독기로 한편으로는 어둡고 침울한 시기였다. 가끔 작고 예쁜 물건에 미혹되고, 학업에 집중하지 못해 진도가 느리다며 강학관들에게 질책을 받기도 한 데에는 그를 둘러싼 환경도 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25-27쪽, ‘1장 갑작스런 즉위, 왕도란 무엇인가?’ 중에서


고종은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청의 억압과 굴레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고종의 편에 서서 충직한 신료가 되기보다는 더 강력한 권력을 발휘하는, 청에 빌붙는 조선 관료들의 해바라기 성향 앞에서 힘을 잃어갔다. 제1차 조러밀약이 비밀리에 진행될 당시에는 친청파였던 김윤식이 이 내용을 청에 알려주었었다. 제2차 조러밀약사건이 불거졌을 때에는 민씨 일족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핵심인물이었던 민영익이 원세개에게 고발하다시피 했다. 민영익은 이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원세개의 국왕 폐위 음모를 고종에게 밀보해주기도 하였다. 조선 관료로서의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중간첩 역할로 인해 민영익은 결국 조선와 중국 양쪽에서 버림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홍콩으로 망명한 뒤 그의 소식은 접할 길이 없게 되었다. 이처럼 몇몇 관료들은 국왕에게 충성을 보이기보다 오히려 청에 더 밀착되어 있는 분위기였다. 권력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인간의 원초적인 속성에서 기인한 문제로 보기에는 사안이 너무 무겁다. 당면한 조선의 슬픈 현실은 고종의 권력보다 원세개의 전권이 월등하게 강고하다는 사실이었다.
-157쪽, ‘5장 정치적 위기와 대응’ 중에서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두 번째로 아버지의 정치적 경험과 역량에 압도당하는 비참한 상황을 맞았고, 이 날 이후 두 사람은 완전히 적대적 관계로 굳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6, 7월경 대원군이 손자인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 사건을 일으킨 것이 드러나, 둘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일본 측에서는 대원군이 군비증강을 요구하면서 손자 이준용과 합세하여 오랜 숙원 관계었던 왕후를 폐비시키려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중략) 이처럼 고종 및 민씨 세력의 구심점인 왕후와 대원군의 정치적 알력은 갑오개혁을 계기로 극대화되었다. 이후 개선의 여지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대원군은 국왕 탄신일을 기회로 입궐하여 두 사람 간의 격조한 사이를 개선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각국 공사를 알현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알현할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나아가 어머니인 운현궁 부대부인의 사망 후에도 가지 않았다. 대원군이 사망한 후에도 중추원 부의장 신기선을 보내 제사를 대신 지내게 했을 뿐이다. 부자간에 시작된 감정의 악화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결말이 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193-194쪽, ‘7장 개혁과 좌절, 그리고 극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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