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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김구 (지은이), 배경식 (엮은이)
  |  
너머북스
2008-07-25
  |  
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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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책 정보

· 제목 :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96123910
· 쪽수 : 701쪽

책 소개

<백범일지>에 관한 텍스트 분석이자 ‘인간 백범’에 대한 새로운 탐사이다. 다른 판본과 다른 특징은 새로운 자료와 연구 성과에 근거한 58편의 ‘깊이읽기’와 132개의 해설이다. 원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사학자의 분석은 <백범일지>의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백범의 삶을 재구성한다.

목차

책을 펴내며 인간 백범의 재발견을 위한 첫 탐사
백범 출간사

상권

인과 신 두 아들에게
<깊이읽기> 비운의 가족사와 눈물겨운 아들 사랑

1. 상놈의 한을 품고 자란 어린 시절
역적의 방계 후손
<깊이읽기> ‘역적의 방계 후손’에서 ‘경순왕의 후손’으로
해주 텃골의 개구쟁이
<깊이읽기> 백범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
<수호지>의 영웅 같은 아버지
<깊이읽기> 만인의 모범이 된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가난 속의 글공부
과거 낙방
<깊이읽기> 과거제도의 문란과 과거 실패의 교훈

2. ‘아기접주’의 꿈과 좌절
열여덟 살의 ‘아기접주’
<깊이읽기> 백범 일행의 최시형 방문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
<깊이읽기> 해주성 전투의 진실
자중지란
<깊이읽기> 동학 관련 세 가지 미스터리
청계동의 안진사
<깊이읽기> 안중근 집안과의 소중한 인연
평생 스승 후조 고능선
<깊이읽기> 고능선은 누구인가?

3. 청국 시찰과 단발 의병
망해 가는 나라를 살리는 방법
<깊이읽기> 청국행 동지 김형진과 <노정약기>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일대 여행
<깊이읽기> 백범은 광개토왕비를 몰랐다
청국 무관과 의형제를 맺다
<깊이읽기> 서로 다르게 기록한 청국 장수와의 만남
강계성 공격 실패
스승의 손녀사위의 꿈이 깨어지다
<깊이읽기> 왜 백범은 다시 청국으로 향했을까?

4. 치하포 사건과 법정투쟁
변복의 일본인
국모의 원수를 갚다
<깊이읽기> 쓰치다의 신분에 대한 의혹
첫번째 투옥과 고문
제물포 개항 이래 처음 보는 ‘희귀사건’
<깊이읽기> 1차 신문의 쟁점
옥중의 왕이 되다
<깊이읽기> 2, 3차 신문의 쟁점과 사후처리 문제
감옥을 학교로 만들다
<깊이읽기> 옥중 독서를 통한 사상 전환과 <태서신사>
고종의 사형정지령
<깊이읽기> 백범은 어떻게 목숨을 구했을까?
의기남아 김주경의 구명운동
<깊이읽기> 부모님의 눈물겨운 구명운동
심야의 탈옥
<깊이읽기> 백범 김구, 한국 근대 최초의 탈옥사건의 주인공이 되다

5. 방랑과 모색의 시기
병서를 외우는 거지
정처 없는 삼남 방랑길
<깊이읽기> 잊지 못할 심송부락의 추억
양반의 낙원은 삼남, 상놈의 낙원은 서북
<깊이읽기> 충무공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동학과의 결별
마곡사에서 중이 되다
반년 만의 하산
양반을 비웃는 ‘걸시승’
<깊이읽기> 불교가 미친 사상적 영향
동지 찾아 다시 방랑길
삼남 유생들과의 교류
<깊이읽기> 유완무와 유생들의 비밀서클
스승과의 사상논쟁
<깊이읽기> 치하포 사건을 칭송한 유인석의 <소의신편>
아버지의 죽음

6.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약혼녀의 죽음과 기독교 입교
<깊이읽기> 기독교 입교와 신교육운동의 동지들
안창호 여동생과의 약혼 실패
세 번 실패 끝의 자유결혼
을사늑약 반대 상소운동
<깊이읽기> 기독교인들의 을사늑약 반대 상소운동
안악 사범강습회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안중근 의거로 두번째 투옥
<깊이읽기>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
이재명 의사의 권총을 빼앗은 회한
<깊이읽기> 법정에서 일본인 재판관을 꾸짖은 이재명

7. 서대문감옥의 ‘국사범 강도’
신민회 비밀회의
안명근 사건으로 세번째 투옥
<깊이읽기> 잔인한 고문과 허위자백으로 날조한 안악사건
여덟 번 고문에 일곱 번 기절
<깊이읽기> 일제가 가한 고문의 종류는 모두 72가지
가족의 수난과 15년형
<깊이읽기> 안명근 사건 선고공판
뭉우리돌 정신
옥중 신고식
<깊이읽기> 일제의 조작극 ‘105인 사건’
옥중생활
<깊이읽기> 오줌세례를 받고도 태연했던 백범
<깊이읽기> 이승만, 동지인가 라이벌인가?
활빈당 두령 ‘김진사’
<깊이읽기> 활빈당의 유래와 조직
호를 ‘백범’으로 고친 까닭

8. 고국 탈출
인천감옥 이감
4년 8개월 만의 가석방
동산평농장의 농감
좁쌀장수로 변장하고 상해 망명
<깊이읽기> 백범의 상해 도착과 차장제의 채택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깊이읽기> 혁명가 아내의 쓸쓸한 죽음

내 인생을 되돌아보며

하권
하권을 쓰면서
<깊이읽기> 하권의 집필 시점과 동기

9. 임시정부에 운명을 맡기다
상해 임시정부의 탄생
문지기를 자청했던 경무국장
<깊이읽기> 임시정부의 실력자, 경무국장 백범 김구의 활약
경호원 한태규의 배신
모스크바 자금이 불러온 재앙
<깊이읽기> 모스크바 자금과 김립 암살사건
독립운동단체의 분열
<깊이읽기> 살부회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문전걸식하는 국무령
<깊이읽기> “헝겊신마저도 감지덕지...”
편지정책
<깊이읽기> 백범을 후원한 미주 교포들

10. 살신성인, 이봉창과 윤봉길
이봉창의 ‘위대한 인생관’
<깊이읽기> 이봉창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까닭은?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깊이읽기>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뜻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한다
<깊이읽기> “나의 빈 무덤에 한잔 술을 부어놓아라”
‘홍구공원 채소장수’의 쾌거
<깊이읽기> 안창호의 체포와 윤봉길 의거의 진상발표
상해탈출
<깊이읽기> 백범 일행의 가흥 피신

11. 피신과 유랑의 세월
가흥 피신생활
중국농가 견문의 교훈
장개석과의 면담
<깊이읽기>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5당 통일운동의 실패와 한국국민당 결성
남경탈출
비운의 가족사
<깊이읽기> 곽낙원 여사의 국내 탈출
동포가 쏜 총탄에 쓰러지다
<깊이읽기> “단군 한배의 피를 가진 놈이면 왜적의 개질을 하는 놈이라도
나를 채치지 못하리라 믿었습니다“

12. 중경시대
중국대륙을 횡단해 중경 도착
동지들의 ‘지하회장’이 되신 어머니
7당통일회의 실패와 한국독립당 창당
<깊이읽기> 기강 7당회의 실패 원인과 백범의 리더십의 한계
광복군 창설
대륙에 묻힌 영혼들
<깊이읽기> 이명옥 일가족의 비극

계속편

13. 해방 전후의 임시정부
탈출 학병들의 중경 도착
한미합동 국내침투훈련
<깊이읽기> 광복군의 독수리작전과 백범의 서안 시찰
아! 왜적이 항복
중경 생활의 추억
<깊이읽기> 장남 김인의 사망
상해 땅을 다시 밟고

14. 고국에 돌아와서
27년만의 환국
지방순회와 3의사의 유골봉환
옛자취가 서린 삼남 순회
서부지방 순회

나의 소원

부록
연보로 읽는 백범 김구의 삶
참고문헌
<백범일지> 인명사전, 찾아보기

저자소개

김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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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식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지금은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 일지》를 엮었으며, 지은 책으로는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2, 3》(공저), 《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8》,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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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왜놈이 나의 신문에 대하여 사실대로 법률을 적용한다면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최고 2년형밖에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안명근의 이른바 강도사건에다 억지로 끌어붙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내가 경성 양기탁 집에서 서간도 사건을 회의하여 이동녕을 보낸 날짜가 바로 안명근이 안악에 와서 원행섭, 박형병, 고봉수, 한정교 등과 안악의 부잣집을 습격하자고 회의했다는 날이었다. 그래서 당시 안악에 있던 금흥량, 김용제, 도인권, 양성진, 장윤근 등은 안명근의 종법으로 쉽게 엮을 수 있었지만 나는 그날 경성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쉽지 않았다. [......]
왜놈들은 내가 그날 안악에서 회의에 참석한 것을 보았다는 증인으로 양산학교 교지기의 아들인 열네 살의 이원형李元亨 학생을 잡아들였다. [......]
왜놈들은 죽일 것처럼 을러대고, 조선인 순사놈은 원형을 달래며 말한다.
"이 미련한 놈아. 김구도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만 하면 지금 당장 네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도록 말을 잘 해줄터이니 시키는 대로 말을 해라."
그러자 원형이 겁을 먹고 말한다.
"시키는 대로 말할 테니 제발 때리지 마세요."
나를 신문하던 검사놈이 초인종을 울렸다. 원형을 문 안쪽으로 끌고 와서 세워놓고 묻는다.
"양산학교에서 안명근이 금고와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예"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원형을 문밖으로 끌고 나간다. [......]
나는 검사놈을 보고,
"500여 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두 군데 회의에 다 참석한 김구를 만드느라고 매우 수고스럽겠소."
라고 말했다. 이것으로 예심이 끝났다. (350~351쪽, '서대문감옥의 '국사범 강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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