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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김구·여운형 (합작과 통일, 시대와의 불화)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일반
· ISBN : 9788936481155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26-02-20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일반
· ISBN : 9788936481155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26-02-20
책 소개
한국 근현대사의 거두이자 해방 공간의 분단체제 형성 과정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김구와 여운형의 연설과 산문, 관련 논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8·15 해방 직후부터 각 인물의 암살에 이르는 생애 마지막 결정적 시기에 그들이 펼친 정치의 핵심인 ‘좌우합작론’과 ‘남북통일론’을 다룬다.
식민과 분단에 부딪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한반도 격변의 중심에서 백범과 몽양이 걸어간 길
창비 한국사상선 제21권 『김구·여운형: 합작과 통일, 시대와의 불화』는 한국 근현대사의 거두이자 해방 공간의 분단체제 형성 과정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김구와 여운형의 연설과 산문, 관련 논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8·15 해방 직후부터 각 인물의 암살에 이르는 생애 마지막 결정적 시기에 그들이 펼친 정치의 핵심인 ‘좌우합작론’과 ‘남북통일론’을 다룬다.
이 책의 엮은이 도진순은 김구와 여운형이 출신 성분부터 사상적 지향이 판이했다면서, 이처럼 상반되는 역사적 인물들을 한권에 다루는 것은 쟁점별로 각 인물을 교차 검정하여 소개함으로써 역사적 인물을 신화화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김구와 여운형의 기본 자료뿐 아니라 타인의 자료도 삽입하여 “사이드 미러처럼 다른 자료의 사각 지대도 조명”(14면)하고자 했다는 설명도 붙였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김구의 정치노선을 이해하기 위한 길라잡이
황해도에서 상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김구(1876~1949)는 38세 때 ‘김구(金九)’라는 이름을 얻을 때까지 수없이 다양한 이름을 바꿔가며 유랑했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에 대한 평가 또한 다채로워서 “의열을 선호한 ‘테러리스트’인가, ‘문화국가’를 강조한 문화주의자인가? 반공 극우주의자인가, 통일운동가인가?” 등의 질문이 여전히 제기된다. 이 책에서는 김구가 해방 직후부터 1947년까지 임시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신탁통치 반대와 독립정부 수립’ 노선을 걷다가, 1948년부터 안두희의 총에 맞아 암살당한 1949년까지는 기존의 방향을 조정하여 ‘통일·독립’ 노선을 지향하며 미소 양군 철수와 독립정부 수립을 주장한 데에 초점을 맞춘다. 즉, 김구를 정확히 이해하는 지름길은 이 두 시기를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8·15 해방 당시 중국 충칭에 있던 김구는 9월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임시정부의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임시정부 법통론을 전제로 보통선거로 정부를 수립하기까지의 이정표를 제시한다. 11월 귀국한 뒤 12월에 열린 임시정부 개선환영대회에서도 그는 만원 군중 앞에서 임시정부가 유일한 대표기구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8일 모스끄바 3상회담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정국은 돌변한다. 김구는 이를 수습하고자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지만, 여기에 이승만이 합류하면서 회의 기구가 미군정의 자문기구인 민주의원으로 전환되어버린다. 이는 곧 임시정부가 해체 수순을 밟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김구의 임정법통론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와 미소공동위원회 저지 활동을 벌이며 이승만과 합작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의 피살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면서 정국은 뒤숭숭해진다. 김구는 1948년 미소 양군 철수 이후에 남북의 전국 총선을 치르자고 제안한다. 기존의 이승만·한민당과 연대하여 남한 단독선거를 추진하던 입장에서 선회한 것이다. 이어서 김구는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서한을 보냈고 이에 북한은 남북한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치르자고 화답했다.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에 참석했고 그 뒤 김규식과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1948년 12월 유엔은 남한 단독정부를 대한민국 정부로 승인했고 김구의 통일·독립 노선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남북한 지도자들의 협상을 이끌어내려던 김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49년 6월 암살당하며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절묘하고도 위험한 행보’의 정치인, 여운형
여운형은 김구의 행적을 훌쩍 넘어서는 전방위적인 광폭 행보의 정치인이었다. 그가 만난 각국의 인물들을 대략만 나열해도 다음과 같다. 중국의 쑨원과 장제스, 마오쩌둥, 소련의 레닌과 트로쯔끼, 일본의 도조 히데끼 수상, 코이소 쿠니아끼, 우가끼 카즈시게 등이다. 광폭의 행보를 보인 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친일에서부터 친미, 친소, 혹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융화주의자 등으로 다양하며, 이 같은 “절묘하고도 위험한 행보”(38면)는 결국 그를 비극적 암살이라는 결말로 이끌었다.
8·15해방 직후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꾸렸다. 건준 세력 내 좌파와의 의견 차이를 무릅쓰고 여운형이 ‘임시정부와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환영’의 문구를 추가하긴 했지만, 여운형의 건국론은 임시정부의 임정법통론과 대립했고 이에 건준 세력 내 좌파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미군정은 ‘인민공화국’ 명칭에서 ‘국(國)’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들을 찾아간 여운형을 문전박대했다. 소련군과 공산당, 심지어 건준 내 좌파들도 여운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모스끄바 3상회담 이후 정세가 급변하여 남북이 신탁통치 반대(남)와 찬성(북)으로 나뉘었고, 여운형의 지위가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14일 민주의원 피선과 사퇴, 15일 민전 의장으로 매일 바뀌었”(46면)을 정도로 대혼란이 일어난다. 신탁통치에 대한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미소 공동위원회도 무기한 휴회되자 여운형은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에 나서지만, 좌우측 모두의 훼방에 의해 지체되고 남한 내 좌익 3당의 합당이 여운형이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다. 이 같은 난관을 헤쳐가기 위해 평양을 찾아가 김일성, 로마넨꼬, 샤프신 등과 만나고 돌아온 여운형은 좌우합작에 열의를 보인다. 하지만 좌우합작은 미군정의 입법의원 선거 추진 등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여러 정치적 승부수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운형은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 북의 김일성·김두봉 등에게 연이어 편지를 보내는데, 이처럼 갖은 난관에도 묘수를 찾고자 하는 여운형의 분투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냉혹한 비방만이 돌아오자 여운형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에 김일성이 여운형을 설득해 남한에 중간파 정당을 수립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어서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중도 좌파 정당의 정치세력화를 기획한다. 그러나 근로인민당 창당 이후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하고 만다.
백범과 몽양이 걸어간 통합의 길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들
8·15해방 이후 남과 북, 좌와 우를 잇고자 노력했던 김구와 여운형이 세상을 떠난 뒤로 가뜩이나 깊고 위험해 보였던 좌와 우 사이의 틈은 더욱 크게 벌어져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은 완전히 등을 돌린 채 서로 다른 세계로 분리되어갔다. 이 책의 엮은이 도진순은 김구(와 김규식)의 민족운동이 ‘통일이 되어야만 독립이 가능하다’는 ‘통일·독립’의 개념을 고유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강조한다. 이는 다시 말해 분단은 곧 식민의 연속일 뿐이라는 한반도 분단체제를 예견하는 날카로운 분석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에서 냉전적 분단체제가 형성되는 원형기, 김구와 여운형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 방안은 ‘시대와의 불화’로 ‘공염불’이 되고, 연이어 암살되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두 사람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 시도가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당대에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암살되는 비극을 통해 ‘시대와의 불화’를 어떻게 해결·극복할 것인지 우리에게 과제로 남기고 있다”(63면)고 엮은이는 말한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한반도 격변의 중심에서 백범과 몽양이 걸어간 길
창비 한국사상선 제21권 『김구·여운형: 합작과 통일, 시대와의 불화』는 한국 근현대사의 거두이자 해방 공간의 분단체제 형성 과정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김구와 여운형의 연설과 산문, 관련 논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8·15 해방 직후부터 각 인물의 암살에 이르는 생애 마지막 결정적 시기에 그들이 펼친 정치의 핵심인 ‘좌우합작론’과 ‘남북통일론’을 다룬다.
이 책의 엮은이 도진순은 김구와 여운형이 출신 성분부터 사상적 지향이 판이했다면서, 이처럼 상반되는 역사적 인물들을 한권에 다루는 것은 쟁점별로 각 인물을 교차 검정하여 소개함으로써 역사적 인물을 신화화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게끔 하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김구와 여운형의 기본 자료뿐 아니라 타인의 자료도 삽입하여 “사이드 미러처럼 다른 자료의 사각 지대도 조명”(14면)하고자 했다는 설명도 붙였다.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김구의 정치노선을 이해하기 위한 길라잡이
황해도에서 상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김구(1876~1949)는 38세 때 ‘김구(金九)’라는 이름을 얻을 때까지 수없이 다양한 이름을 바꿔가며 유랑했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에 대한 평가 또한 다채로워서 “의열을 선호한 ‘테러리스트’인가, ‘문화국가’를 강조한 문화주의자인가? 반공 극우주의자인가, 통일운동가인가?” 등의 질문이 여전히 제기된다. 이 책에서는 김구가 해방 직후부터 1947년까지 임시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신탁통치 반대와 독립정부 수립’ 노선을 걷다가, 1948년부터 안두희의 총에 맞아 암살당한 1949년까지는 기존의 방향을 조정하여 ‘통일·독립’ 노선을 지향하며 미소 양군 철수와 독립정부 수립을 주장한 데에 초점을 맞춘다. 즉, 김구를 정확히 이해하는 지름길은 이 두 시기를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8·15 해방 당시 중국 충칭에 있던 김구는 9월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임시정부의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임시정부 법통론을 전제로 보통선거로 정부를 수립하기까지의 이정표를 제시한다. 11월 귀국한 뒤 12월에 열린 임시정부 개선환영대회에서도 그는 만원 군중 앞에서 임시정부가 유일한 대표기구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8일 모스끄바 3상회담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정국은 돌변한다. 김구는 이를 수습하고자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지만, 여기에 이승만이 합류하면서 회의 기구가 미군정의 자문기구인 민주의원으로 전환되어버린다. 이는 곧 임시정부가 해체 수순을 밟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김구의 임정법통론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김구는 신탁통치 반대와 미소공동위원회 저지 활동을 벌이며 이승만과 합작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의 피살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면서 정국은 뒤숭숭해진다. 김구는 1948년 미소 양군 철수 이후에 남북의 전국 총선을 치르자고 제안한다. 기존의 이승만·한민당과 연대하여 남한 단독선거를 추진하던 입장에서 선회한 것이다. 이어서 김구는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서한을 보냈고 이에 북한은 남북한 대표자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치르자고 화답했다. 그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연석회의에 참석했고 그 뒤 김규식과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1948년 12월 유엔은 남한 단독정부를 대한민국 정부로 승인했고 김구의 통일·독립 노선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남북한 지도자들의 협상을 이끌어내려던 김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49년 6월 암살당하며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절묘하고도 위험한 행보’의 정치인, 여운형
여운형은 김구의 행적을 훌쩍 넘어서는 전방위적인 광폭 행보의 정치인이었다. 그가 만난 각국의 인물들을 대략만 나열해도 다음과 같다. 중국의 쑨원과 장제스, 마오쩌둥, 소련의 레닌과 트로쯔끼, 일본의 도조 히데끼 수상, 코이소 쿠니아끼, 우가끼 카즈시게 등이다. 광폭의 행보를 보인 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친일에서부터 친미, 친소, 혹은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융화주의자 등으로 다양하며, 이 같은 “절묘하고도 위험한 행보”(38면)는 결국 그를 비극적 암살이라는 결말로 이끌었다.
8·15해방 직후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꾸렸다. 건준 세력 내 좌파와의 의견 차이를 무릅쓰고 여운형이 ‘임시정부와 해외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환영’의 문구를 추가하긴 했지만, 여운형의 건국론은 임시정부의 임정법통론과 대립했고 이에 건준 세력 내 좌파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미군정은 ‘인민공화국’ 명칭에서 ‘국(國)’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들을 찾아간 여운형을 문전박대했다. 소련군과 공산당, 심지어 건준 내 좌파들도 여운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모스끄바 3상회담 이후 정세가 급변하여 남북이 신탁통치 반대(남)와 찬성(북)으로 나뉘었고, 여운형의 지위가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14일 민주의원 피선과 사퇴, 15일 민전 의장으로 매일 바뀌었”(46면)을 정도로 대혼란이 일어난다. 신탁통치에 대한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미소 공동위원회도 무기한 휴회되자 여운형은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에 나서지만, 좌우측 모두의 훼방에 의해 지체되고 남한 내 좌익 3당의 합당이 여운형이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다. 이 같은 난관을 헤쳐가기 위해 평양을 찾아가 김일성, 로마넨꼬, 샤프신 등과 만나고 돌아온 여운형은 좌우합작에 열의를 보인다. 하지만 좌우합작은 미군정의 입법의원 선거 추진 등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여러 정치적 승부수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운형은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 북의 김일성·김두봉 등에게 연이어 편지를 보내는데, 이처럼 갖은 난관에도 묘수를 찾고자 하는 여운형의 분투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냉혹한 비방만이 돌아오자 여운형은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에 김일성이 여운형을 설득해 남한에 중간파 정당을 수립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어서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중도 좌파 정당의 정치세력화를 기획한다. 그러나 근로인민당 창당 이후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하고 만다.
백범과 몽양이 걸어간 통합의 길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들
8·15해방 이후 남과 북, 좌와 우를 잇고자 노력했던 김구와 여운형이 세상을 떠난 뒤로 가뜩이나 깊고 위험해 보였던 좌와 우 사이의 틈은 더욱 크게 벌어져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은 완전히 등을 돌린 채 서로 다른 세계로 분리되어갔다. 이 책의 엮은이 도진순은 김구(와 김규식)의 민족운동이 ‘통일이 되어야만 독립이 가능하다’는 ‘통일·독립’의 개념을 고유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강조한다. 이는 다시 말해 분단은 곧 식민의 연속일 뿐이라는 한반도 분단체제를 예견하는 날카로운 분석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에서 냉전적 분단체제가 형성되는 원형기, 김구와 여운형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 방안은 ‘시대와의 불화’로 ‘공염불’이 되고, 연이어 암살되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두 사람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 시도가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당대에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암살되는 비극을 통해 ‘시대와의 불화’를 어떻게 해결·극복할 것인지 우리에게 과제로 남기고 있다”(63면)고 엮은이는 말한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목차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서문
좌우합작 통일독립, 시대와의 불화
핵심저작
【 김구 】
1장 불변의 임정법통론: 환국과 환영
2장 반탁·독립의 행로: 임정 주석에서 한독당 당수로
3장 진동: 좌우합작·반탁운동·단독정부
4장 나의 소원
5장 전환: ‘반탁·독립’에서 ‘통일·독립’으로
7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8장 유엔 총회 대한민국 승인 문제와 여순사건
9장 김구, 최후의 광경
【 여운형 】
1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20일 천하
2장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조선인민당’으로
3장 1차 미소공위와 남북·좌우합작
4장 좌익 3당합당과 인민당 당수 사퇴
5장 김일성·로마넨꼬와의 회담과 좌우합작
6장 남북 고위 접촉과 정계 은퇴
7장 2차 미소공위, 근로인민당, 암살
김구 연보
여운형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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