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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여운형

김구·여운형

(합작과 통일, 시대와의 불화)

김구, 여운형 (지은이), 도진순 (편저)
창비
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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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여운형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김구·여운형 (합작과 통일, 시대와의 불화)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일반
· ISBN : 9788936481155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26-02-20

책 소개

한국 근현대사의 거두이자 해방 공간의 분단체제 형성 과정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김구와 여운형의 연설과 산문, 관련 논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8·15 해방 직후부터 각 인물의 암살에 이르는 생애 마지막 결정적 시기에 그들이 펼친 정치의 핵심인 ‘좌우합작론’과 ‘남북통일론’을 다룬다.

목차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서문
좌우합작 통일독립, 시대와의 불화

핵심저작
【 김구 】
1장 불변의 임정법통론: 환국과 환영
2장 반탁·독립의 행로: 임정 주석에서 한독당 당수로
3장 진동: 좌우합작·반탁운동·단독정부
4장 나의 소원
5장 전환: ‘반탁·독립’에서 ‘통일·독립’으로
7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8장 유엔 총회 대한민국 승인 문제와 여순사건
9장 김구, 최후의 광경

【 여운형 】
1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20일 천하
2장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조선인민당’으로
3장 1차 미소공위와 남북·좌우합작
4장 좌익 3당합당과 인민당 당수 사퇴
5장 김일성·로마넨꼬와의 회담과 좌우합작
6장 남북 고위 접촉과 정계 은퇴
7장 2차 미소공위, 근로인민당, 암살

김구 연보
여운형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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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김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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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지은이)    정보 더보기
(呂運亨, 1886~1947)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가. 경기도 양평 출생. 조선시대 양반사회와 계급주의를 신봉하는 부친과 달리 동학에 가담한 조부와 증조부에게 큰 영향을 받음.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를 접하고, 홍화학교와 우무학당에서 수학.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킴. 1907년부터 선교사 보조원 생활을 했으며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계몽하는 데 앞장섬. 이후 강릉 초당의숙에서 평등사상과 신학문을 가르쳤으나 총독부에 의해 1년 만에 폐쇄.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신학문 공부, 1918년 상하이에서 장덕수를 만나 정치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일대 전환기를 맞음. 1920년 조선 독립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제안에 공산당에 참여했으나 와해됨.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의 사정을 논의,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쑨원과 중국 공산당 인사들과 교류, 1925년부터 중국혁명운동에 적극 참여. 1929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됨. 이후 중국에서 실패한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허망한 날을 보냈으나 국내에 서 일약 유명인이 됨. 1933년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며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그의 명성에 힘입어 번창했으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936년 폐간됨. 1944년 조선건국동맹 조직. 1945년 광복을 맞아 건국 준비위원회 조직, 임시정부 지사들과 대립. 1946년 민주 주의민족전선을 결성, 반대파에 밀려 탈퇴. 1947년 근로인민당을 조직했으나 극좌, 극우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 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조선건국동맹 위원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당 당수, 조선체육회 (대한체육회 전신) 제11대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대통령장(2005), 대한민국장(2008)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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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순 (주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하버드대학, 일본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중국 베이징대학, 타이완 타이완대학 방문교수를 역임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백범김구선생 시해 진상규명 위원회’ 전문자문위원,‘백범김구선생전집 편찬위원회’ 위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이사,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 관계』(서울대출판부, 1997)로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했고, 주해본 『백범일지』(돌베개, 1997)가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되었으며, 대중용 『쉽게 읽는 백범일지』(돌베개, 2005)는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에 선정되어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2009년 동아시아출판인회의의 ‘동아시아 100권의 책’에 선정되어 중국어·일본어로 번역되었다. 『백범일지』 친필 원문을 탈초한 『정본 백범일지』(2016, 돌베개), 백범과 몽양의 대표작을 엮은 『김구·여운형: 합작과 통일, 시대와의 불화』(창비, 2026)도 출간했다. 이외에도 「백범일지의 원본·필사본·출간본 비교 연구」, 「휘호로 본 백범 김구, 그 삶의 궤적과 진수」 등 백범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백범 김구의 일생과 사상적 맥락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백범 연보』(근간)를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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