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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명시모음집
· ISBN : 9788996668138
· 쪽수 : 320쪽
책 소개
목차
서문
봄
물 위의 진흙 소가 달빛 밭을 갈고
강호에 봄이 다해
종일 몸을 잊고 앉았으니
온갖 물건 대하여도
날이 다하도록 봄을 찾아도
부귀영화는 모두 봄날의 꿈이요
삼십 년을 칼을 찾던 나그네여
춘삼월 햇빛 모아둘 곳 없어서
누각 밖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은
봄에는 꽃이 피고
(...)
여름
연꽃잎 달빛 향해 가슴을 열고
한 잔의 차에 한 조각 마음이 나오니
꽃은 섬돌 앞 내리는 비에 젖어 웃고
선암에 일없이 적막 속에 앉았으니
산은 무심히 푸르고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지
돌아와 발을 씻고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굽이치나니
십 년을 단정히 앉아
구름은 달리는데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
가을
멀리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
하늬바람 불자 비는 벌써 그쳤네
구름 걷힌 가을 하늘
바람 불자 나무 열매 자꾸 떨어지고
구름 없는 가을 하늘
낚싯줄 길게 바닷속에 드리우니
고요한 밤 산속의 집에
가을 바다 거친 파도
달은 물속에 잠기고
침상 아래 우는 풀벌레 소리
(...)
겨울
바루 하나로 천가의 밥을 빌며
노파의 적삼을 빌려
온몸이 입이 되어 허공에 걸려
흰 구름 사고 청풍을 팔았더니
가지에 얼어붙은 눈 편편이 떨어지고
한 해에 옷 두 번 기워 입고
한 촉 차가운 등불에 불경을 읽다가
산비탈 한 마지기 노는 밭이여
있네 없네 깔아뭉개 진상을 드러내니
새해의 불법을 그대 위해 설하노니
(...)
지은이 소개
옮긴이 소개
책속에서
못에 담긴 물이 정이 없다 하지 말게나
무용 수연無用秀演
못에 담긴 물이 정이 없다 하지 말게나
그 본성은 원래 하나의 맑음뿐이라네
고요한 달밤이 가장 좋나니
창 너머 때로 마음 씻기는 소리 들려온다네
休言潭水本無情 휴언담수본무정
厥性由來得一淸 궐성유래득일청
最愛寥寥明月夜 최애요요명월야
隔窓時送洗心聲 격창시송세심성
* 해설
달밤의 못물을 두고 지은 멋진 시이다. 고요한 산방의 창 너머로 계곡의 웅덩이에 달빛이 교교하다. 물은 본래 맑은 것으로 모든 것을 씻어주는 청정이 그 이미지다. 때로는 물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씻기는 깨끗함을 느낀다. 더구나 고요한 달밤에 호수나 연못의 물을 보면 은은한 정서가 가슴속에 물이 되어 흐를 것이다. 달빛 젖은 명상에 아련히 떠오르는 물과 같은 정이 고요 속에 그림자처럼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정중靜中의 동動이 되어 고요를 깨뜨리면서 고요에 가라앉는 돌멩이가 되기도 할 것이다.
무용 수연無用秀演 스님이 남긴 이 시는 당시 스님과 교류하던 사대부 김창흡에게 화답한 시로 그 제목이 나와 있다. 유자에게 은연중 불법의 참 이치를 물에 비유해 설해준 것 같기도 하다.
자비심으로 하는 방편의 일이여
굉지 정각宏智正覺 선사
자비심으로 하는 방편의 일이여
부딪치는 곳마다 공부가 있구나
소리와 형상 따라 응용하고 변통하니
둥근 쟁반 위에 구슬이 구르네
慈悲方便事 자비방편사
觸處有工夫 촉처유공부
應變隨聲色 응변수성색
團團盤走珠 단단반주주
* 해설
산다는 것은 힘들고 고단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세상일이 수월해질 수도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하는 일은 괴롭지만,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는 일은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일상의 평범한 일과가 실상은 생활의 방편이다. 말하자면 살아가는 방식을 저마다 현실 속에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이 삶의 파동이요 존재의 활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모든 일에 자비를 띠고 이타원력으로 한다면 하는 일 하나하나가 본분 공부다. 깨달음을 체득하여 도를 얻는 본분 공부가 되는 것이다. 또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불공드리는 일이라고 했다. 때문에 공들이는 일 그 자체가 바로 공부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선사는 중국 송나라 때 묵조선의 거장이었다. 묵조선이란 화두 참구를 하지 않는 선법이다. 5가 7종의 중국 선의 종파 중 조동종 등은 임제종 선풍과 달리 선 수행에 공안을 채택하는 방법을 쓰지 않았다. 천동 굉지는 간화선의 거장 대혜 종고大慧宗?와 같은 시대 인물로, 간화선법을 주장하던 대혜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 역시 당대의 거봉이었다. 그가 먼저 입적하자 묵조 타파를 부르짖으며 오직 간화만이 참된 선법이라 주장했던 대혜가 굉지의 49재 때 영가 법문을 하면서 “법의 바다가 말라버렸고 법의 깃대가 꺾이었다”고 애도를 하기도 했다. 달인분상에서는 밥 먹고 잠자는 것도 공부라고 한다. 자유자재하게 온갖 경계, 곧 소리와 형상을 대하면서 어디에도 걸림 없는 것이 “쟁반에 구르는 구슬과 같다”라고 한 마지막 구가 시원하고도 여유가 넘친다.